11 / 2 (목) 지우개
저녁스케치
2023.11.02
조회 443
살아온 날들을
생각하다 보니
지우고 싶은 순간들이 떠올라
커다란 지우개 하나 들고
한 가지씩 지워본다
지우고 또 지우다 보니
찢어지는 건 오히려 내 마음이더라
때처럼 떨어져 나가는 기억 속에
누군가에게 받았던 사랑이 있고
누군가에게 받았던 은혜가 있고
지우개가 모자라
다 지우지 못할 거라 여겼었는데
그 빈자리에 무얼 채워 넣을까 고민했는데
찢어지는 가슴이 너무 아파
지울 것도 잊고
채울 것도 잊은 채
조용히 지우개를 내려놓는다.
김향아 시인의 <지우개>
불필요한 감정은 얼마든지 지워도 괜찮아요.
하지만 기억은 굳이 지우려 말아요.
그토록 잊고 싶었던 일들이
주먹을 불끈 쥐고 다시 뛰게 하는 힘이 되기도,
또 다른 인생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되어주기도 하니까.
그리고 아픔을 딛고 일어선 기억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삶의 훈장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