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 10 (금) 바람
저녁스케치
2023.02.10
조회 529

스무 살 무렵부터 나는 바람이고 싶었다
그러나 바람의 갈기털은커녕
발목을 밧줄로 묶인 말뚝이 되어 있었다

나는 수시로 뛰쳐나가고 싶었으나
얼마쯤 가다가는 풀이 죽어 돌아오곤 하였다

아버지는 담석증을 앓았고
어머니는 막일을 하고 있었다

삼십 대가 되자 업연은 더 무거워졌고
허리엔 길마가 놓이고 입엔 재갈이 물려졌다

나는 점점 짐을 끄는 한 마리 말처럼 변해갔고
목축의 날들을 벗어나고자
벌판을 몰아칠수록 사나운 짐승이 되어갔다

나이가 더 들어 몸 여기저기가 병들면서
비로소 나를 길들이던
입맛의 굴레로부터 놓여나고
바람을 선물로 받았을 때는
이미 늙어 있었다

문을 열고 나와도
어릴 때부터 꿈꾸던 신선한 시간이
머리칼을 날리며 동행하지 않았고
발걸음은 탄력을 잃은 게 내려다보였다

나는 이미 시선 밖에 있었다
그래도 나는 늦은 나이에 얻은 이 바람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고독이 가득하고
숫되던 날부터 마음의 기슭을 긁어대던 회오리가
생의 골짜기와 벼랑을 지나
느슨한 일상의 평지에 이르러서도
바람의 형상으로 남아 있는 게 고마웠다

나는 이 여윈 바람의 손을 잡고
한 걸음씩 여백을 만나며 나아갈 것이다

자유,

이 자유의 느낌과 향을 맛 본 사람은
알고 있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생의 무엇이었는지.

도종환 시인의 <바람>


어릴 땐 세찬 바람은 맞서 이겨내는 거라 생각했고
한창일 땐 흐르는 바람을 잘 타야 성공한다고 믿었죠.
하지만 지금은 바람이 남기고 간 여백을 보게 됩니다.
몇 마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우리네 삶.
구구절절한 사연들 모두 여백에 실어 보내고는
괜찮다고, 잘해왔다고 스스로를 다독여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