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 27 (목) 누이의 방
저녁스케치
2022.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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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를 따라 백화점에 갔다가
아내가 0이 너무 많이 달린 옷을 집으며 나를 힐끗하기에
어떻게 우리 형편에 그렇게 배짱이 좋으냐고
쏘아붙이고는 휙 나와 찬바람 속을 걷는데
여동생의 얼굴이 몇 십 개의 동그라미로 어른거린다.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전세금이 올랐는데 빌릴 데가 없다며
0을 모두 말하지 못하고 두 장을 얘기하기에
내가 이천이냐고 물으니
깜짝 놀라며 0을 하나 빼고
다섯 장이 올랐는데 어떻게 두 장 안 되겠느냐고 하던 누이
0을 하나 더 빼고 보냈더니
고맙다고 수십 번도 더 한 누이
어머니에게 절대 말하지 말아달라고 한 누이
이혼하고 두 아이를 혼자 키우며
팔십만 원짜리 간병인으로 살아가는 누이
아내는 저만치
까맣고 조그만 0을 달고
하나짜리 0을 달고 수많은 0들 사이로 뒤따라온다.
둘이서 말없이 지하철을 타는데
그날따라 지하철은 왜 그렇게 롤러코스터인지.
앞자리에 앉은 까만 0들은 또 얼마나 무참히도 찌그러져 있는지.
오빠, 물속에서 누가 오래 참을 수 있는지 내기할래?
백만 원이다!
전기철 시인의 <누이의 방>
어릴 적 내기로 하던 백 원, 오백 원에
늘어가는 나이만큼 0이 붙더니,
마치 0이 세상의 전부인 것 마냥
종종거리며 살아가는 어른이 되었네요.
여태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하고
떠다니듯 살아가는 우리네 삶이라 할지라도
가진 0의 개수에 주눅 들진 않았으면 해요.
0으로 얻은 행복은 신기루와 같은 것.
진짜 행복은 0의 개수에 있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