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 3 (목) 담쟁이 인생
저녁스케치
2022.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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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로는 설 수 없는 넝쿨
평지 제쳐두고
물 한 방울 없는 절벽 기어오른다

비바람 모질게 맞아가며
담벼락 물어뜯는 뿌리는 무슨 집착일까

뒤도 볼 새 없이
목 타는 줄기 햇볕에 볶으며
새파란 잎 무수히 매달고
오르기만 하는 담쟁이

드디어, 더는 오를 수 없는 벽의 끝
그리도 동경하던 하늘
올려다보니 빈 구름, 바람뿐
현기증이 나고 오싹해진다
몸을 가눌 수 없다
내려다보니 달고 온 파란 그리움의 잎들
누렇게 멍들어 머잖아 떨어질 것 같다

단번에 오르기만 했던 담쟁이
그제서 깨닫는다
무턱대고 올랐다는 것을,
또, 내려갈 줄도 알았어야 했다는 것을

조남명 시인의 <담쟁이 인생>


이리도 빨리 져버릴 줄 알았다면
앞만 보고 달리라고 말하지 않았을 텐데.
일찍 철들어야 한다며 다그치지도 않았을 텐데.
제일 먼저 담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가 아니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뒤따르는 담쟁이를 보라고 했을 텐데.
때로는 쉬어가라고, 조금 늦어도 괜찮다고 말해줬을 텐데.
쓸쓸히 홀로 선 빛바랜 담쟁이가 안쓰러워
주인 잃은 말을 자꾸만 되뇌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