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도 이사를 하는가보다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할 시간과 공간을 챙겨
기쁨과 슬픔, 떠나기 싫은 사랑마저도 챙겨
거대한 바퀴를 끌고
어디론가 세월도 이사를 하는가보다
어릴 적 내가 살던 동네
기억 속에는 아직도 솜틀집이며 그 옆 이발소며
이빨을 뽑아 지붕 위로 던지던 기와의 너울들
마당을 지나 아장아장 툇마루로 걸어오던
햇빛까지 눈에 선한데
정작 보이는 것은 다른 시간의 사람들뿐
저기 부엌이 있던 자리
지금은 빌라가 들어선 자리
그 이층 베란다쯤 다락방이 있던 자리
엄마가 저녁밥 먹으라고 부르는 소리가
가슴에 초승달처럼 걸려
몇 년 만에 아기를 업고 돌아온 고모와
고모를 향해 소리를 지르던 아버지는
말없이 펌프질을 하던 할머니는
그 마당 그 식솔과 음성들 그대로 끌고
모두 어디로 갔을까
낯설어 더 그리운 골목길을 나오는데
문득 내 마음속에 허공 하나가 무너지고 있었다
허공의 담장 너머 저기
휘어진 골목 맨 끝
기억의 등불 속에 살아오르는 것들
오, 그렇게 아프고 아름답게 반짝이며
살고 있는 것들
권대웅 시인의 <휘어진 길 저쪽>
세월 가는 속도만큼이나
골목이 변하는 속도도 빠르죠.
오래 전 살던 곳을 가보면
기억 속에 집과 가게들은 온데간데없고
대부분이 낯선 것들뿐입니다.
추억은 여기 있는데 세월은 어디로 간 건지..
세월은 주소도 남겨놓지 않고 떠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