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만든다는 제법 엄숙한 길을
언제부턴가 깊이 불신하게 되었다
흐르는 물에 후끈거리는 발을 씻으며
엄지발톱에 낀 양말의 보풀까지 떼어내며
이 고단한 발이 길이었고
이렇게 발을 씻는 순간에 지워지는 것도
또한 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때로는 종달새 울음 같은 사랑을 위해
언젠가는 가슴에서 들끓는 대지를
험한 세상에 부려놓으려 길이,
되었다가 미처 그것을 놓지 못한 발
그러니까 씻겨내려가는 건 먼지나 땀이 아니라
세상에 여태 남겨진 나의 흔적들이다
지상에서 가장 큰 경외가
당신의 발을 씻겨주는 일이라는 건
두 발이 저지른 길을 대신 지워주는 의례여서 그렇다
사람이 만든 길을 지우지 못해
풀꽃도 짐승의 숨결도 사라져가고 있는데
산모퉁이도 으깨어져 신음하고 있는데
오늘도 오래 걸었으니 발을 씻자
흐르는 물에 길을, 씻자
황규관 시인의 <발을 씻으며>
풀꽃도 동물도
결국은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데
사람만이 자꾸 뭔가를 남기고 가려하네요.
사람이 만들고 지우지 못한 것들로 인한
식물과 동물, 자연이 신음이 깊어지는 걸 보니
발을 씻듯이
우리도 지나온 길을 지우고 가야하지는 않나...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