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뷰를 인용보도할 때는
프로그램명 'CBS라디오 <박재홍의 한판승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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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송 : CBS 라디오 <박재홍의 한판승부> FM 98.1 (18:00~19:30)
■ 진행 : 박재홍 아나운서
■ 패널 : 진중권 작가, 김성회 소장
■ 대담 : 김동우 사진작가
◇ 박재홍> ‘미스터션샤인’ 드라마 많이 보셨을 것 같습니다. 이병헌 씨가 연기했던 유진초이의 모티브가 됐다고 알려진 독립운동가 황기환 선생의 유해가 100년 만에 고국 땅에 지난 10일 돌아왔다고 하죠. 올해로 광복 78주년이지만 아직도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 굉장히 많은데요. 이 시간에는 해외 독립운동 유적지를 도시면서 그 역사와 후손들의 삶을 기록한 분을 만나겠습니다. 김동우 사진작가를 모셨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작가님.
◆ 김동우> 안녕하세요.
◇ 박재홍> 굉장히 영화배우 같으셔서 놀랐습니다.
◆ 김동우> 감사합니다. 처음 듣는 얘기인데요.
◇ 박재홍> 그러신가요? 사진작가시고 또 해외 독립운동 유적지를 돌면서 독립운동의 현장 그리고 후손들을 만나시고 또 사진들을 찍어오신 거죠. 그 결과물이 ‘뭉우리돌의 바다’라는. 사진이 굉장히 예쁩니다.
◆ 김동우> 감사합니다.
◆ 진중권> 무슨 뜻입니까?
◆ 김동우> 뭉우리돌이 순 한글인데 그게 백범일지에 등장을 해요. 김구 선생님이 형무소에 고초를 받을 때 순사가 이런 얘기를 해요. ‘지주가 전답에서 뭉우리돌을 골라내는 게 상례아니냐?’ 밭에 있는 둥글둥글한 돌들이거든요, 이게 뭉우리돌이. 그러니까 ‘사회에서 너 같은 독립운동가들 다 솎아내야 된다’ 이 취지로 말씀을 듣고 거기다가 김구 선생님이 ‘내가 네 놈들 앞에 평생 뭉우리돌 정신을 품고 살겠노라’라고 한 대목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찾아다닌 지역이 다 우리의 저항정신을 품고 있는 거 아닌가. 그래서 뭉우리돌을 찾아서.
◆ 김성회> 그런데 거길 왜 찾아가겠다는 생각을 하셨어요, 처음에?
◇ 박재홍> 찾아가신 곳이 인도, 멕시코, 쿠바, 미국.
◆ 김동우> 계기가 있었죠. 인도 가보셨나요?
◆ 김성회> 못 가봤어요.
◆ 김동우> 인도 하면 뭐가 떠오르세요?
◆ 김성회> 인도 하면 소? 타지마할.
◆ 김동우> 그렇죠.
◇ 박재홍> 당황하셨어요, 지금 방송하시면서 처음 질문을 받아봤어요.
◆ 김동우> 그래요? 저도 그랬는데 델리에 가면 레드 포트라는 붉은 성이 있어요. 그게 타지마할를 만든 샤 자한이 만든 성인데 그 성이 2차 세계대전 때 영국군 주인도 총사령부 터로 쓰여요. 그런데 우리 광복군이 1943년에 9명의 광복군이 거기로 갑니다. 그래서 그 성터에서 암호해독, 통신 감청, 포로신문 그다음에 대적 선무방송 이런 걸 훈련을 받아요.
◇ 박재홍> 인도에서?
◆ 김동우> 그래서 실제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합니다. 그분들의 이름이 인면전구공작대예요. 그런데 저는 이런 역사를 학교 다닐 때 한 번도 배운 적이 없어요.
◆ 진중권> 인면이라는 게.
◆ 김동우> 인도와 미얀마라는 얘기고, 전구는 전투지역. 그렇게 되는 거죠. 그런데 학교 다닐 때 교과서에 이런 얘기들이 없다 보니 제가 인도 하면 저도 소 이런 것만 생각하다가 ‘우리나라랑 독립운동으로 연관된 땅이야?’ 하고 너무 놀란 거죠.
◇ 박재홍> 대개는 놀라고 마는데 우리 작가님은 그걸 또 굳이 가셔서 사진고 사진을 찍고 탐구를 하시고.
◆ 진중권> 그렇게 또 인도 지역까지 간 우리의 독립운동가들이죠, 참전한. 그분이 거기서 한국말 하는 선교사를 만나요.
◆ 김동우> 맞아요. 우리암 선교사라고 공주에 가면 유관순 열사가 나온 영명학교. 그 설립자거든요. 41년에 추방이 돼요, 한국에서. 그분이 인도에 가셨던 거예요. 교육사업하겠다고. 거기서 인면전구공작대분들이 그분 학교에서 영어교육을 또 받습니다.
◆ 진중권> 얼마나 황당했겠어. 딱 갔는데 한국말을 하고.
◇ 박재홍> 어서 와, 인도는 처음이지? 이러면서.
◆ 김동우> 그런 또 뭉클한 역사가 있더라고요.
◆ 김성회> 왜 찾아가셨냐고요? (웃음) 나는 그게 궁금해요.
◆ 김동우> 그래서 제가 찾아봤죠. 그러면 제가 몰랐던 독립운동 현장이 전 세계 얼마나 많은 지역에 분포돼 있나 찾아갔더니 만주, 상해, 연해주 이 정도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그게 아니더라고요. 전 지구적으로 다 있더라고요. 그래서 또 찾아봤습니다. 이거를 기록한 사람이 있었나? 없더라군요. 누군가는 할 것 같은데 이게 나였나? (웃음) 시작을 하게 됐습니다.
◇ 박재홍> 대단하시네요.
◆ 진중권> 이게 그냥 기록만이 아니라 사진이 또 참 아름다웠거든요. 분위기가 있고 그래서 마치 그림책 읽는 듯이 빨려들어서 저도 이 책에 빨려들었습니다.
◆ 김동우> 고맙습니다.
◇ 박재홍> 뭉우리돌의 바다. 뭉우리돌 얘기 들으니까 가슴이 또 웅장해지는데 저희가 이제 일단 작가님 모셔서 처음 들어볼 얘기는 100년 만에 유해가 봉헌된 황기환 선생의 얘기입니다. 제가 초두에 미스터션샤인의 이병헌 씨가 연기됐던 미군 유진초이 얘기인데 실제로 미군이긴 했죠?
◆ 김동우> 그래서 사람들이 흔히 유진초이의 삶을 다 똑같이 닮았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미군이었다’만 맞습니다.
◇ 박재홍> 유진초이는 해병대 장교였고 그런데 이분은 의무병이셨던 것 같아요.
◆ 김동우> 맞습니다. 구호를 담당하셨던 의무병이셨고 울 이민의 역사 중에 하와이 이민이 있잖아요. 1902년부터 5년까지 한 7300명의 사람이 넘어가 되는데 그중에 한 분이었어요. 그러다가 미국 본토로 나오셔서 1차 세계대전 때 미군으로 참전을 하게 되죠. 그리고 이제 유럽으로 가신 거예요.
거기서 전쟁이 끝난 다음에 누구를 만나게 되냐면 파리 강화회의의 김규식 선생님을 만난 거예요. 그래서 임정의 파리위원부를 만들 건데 좀 도와달라고 해서 거기에 서기장 역할을 맡고 임정에서 일을 하게 되죠. 그러다가 이때 어떤 전보 한 통이 날아들어요. 그런데 무슨 내용이였냐면 무르만스크라고 모스크바에서 북쪽으로 쭉 올라가면 북극해 가는데 무르만스크라는 항구가 있었어요. 지금도 무르만스크라는 항구가 있는데 거기에 한국인 노동자들이 있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일부가 거기에 있다가 영국군을 따라서 스코틀랜드로 나갔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때는 영일 동맹 상황이었거든요. 영국은 당연히 이 사람들은 일제치하의 땅으로 돌려보내려고 했겠죠. 안 되잖아요. 그래서 영국에 갑니다. 영국과 프랑스 정부를 오가면서 이 사람들을 내가 프랑스로 데리고 나오겠다. 가서 설득 작업을 해나가시죠. 그런데 한 200여 명 정도가 그 당시 영국에 있었는데 한국 사람들이 다는 못 데리고 나오고 35명 정도의 사람들을 프랑스로 데리고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이분들이 1차세계대전 전후 복구 사업에 투입이 돼요. 그래서 프랑스 동쪽에 쉬이프라는 작은 도시가 있는데 거기서 잔해 치우고 죽은 사람들 공동묘지 만들고. 그런 일들을 해 나가시면서 거기서 번 돈을 가지고 또 프랑스에서 독립자금을 내신 거예요. 그리고 그분들이 거기서 제법한국민회라는, 그러니까 그게 프랑스 한인회 전신이에요. 그런 조직을 만들어서 3.1운동 기념식도 프랑스에서 하시고 그런 활동을 해나가는 단초 역할을 황기환 선생님이 하신 거죠.
◇ 박재홍> 대단한 일을 많이 하셨네요. 그런데 이분이 이제 19살에 징집선을 타고 하와이로 갔다라고 하는데 그러면 어떻게 가게 되신 거예요? 그냥 살기 위해서? 아니면 경제활동을 위해서?
◆ 김동우> 처음부터 독립운동에 투신하려고 가신 건 아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와이에 노동자로 갔다가 선택을 해야 돼요. 고향에 돌아가든가 하와이에 남든가 아니면 미국 본토로 나가든가. 그런데 중국 사람들과 일본 사람들의 귀향 비율은 한 50% 정도 됐대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30%로 떨어져요. 나라의 처지가 별로 좋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미국 본토로 나가신 분들도 많거든요. 그래서 본토로 나가신 분 중에 또 한 분이죠.
◇ 박재홍> 황기환 선생이 그렇게 해서 미국 1차대전에 참전을 했고 그 이후에 러시아에 일하던 우리 노동자를 교섭을 통해서 송환하는 걸 또 맡기도 했고 그 가운데 이제 다시 돕기 위해서 미국으로 왔다가 돌아가신 상황인데 그때는 어떻게 된 거예요?
◆ 김동우> 그래서 독립운동을 돕기 위해서 미국으로 가십니다. 그래서 뉴욕과 워싱턴을 중심으로 활동을 하시다가 결혼을 안 하신 상태였어요. 40대 초반.
◇ 박재홍> 미스터션샤인도 결혼 안 했어요. 그건 똑같네요.
◆ 김동우> 싱글이셨는데 갑자기 심장 쪽이 안 좋으셨나봐요. 그래서 병원에서 갑자기 순국하는 결과를 맞게 되는데요. 그리고 장례는 주변 사람들이 이제 도와줘서 해놨겠죠. 그래서 그분이 묻힌 곳이 어디냐면 뉴욕 퀸스에 있는 마운트 올리벳 공동묘지라는 곳이에요. 거기 한 200년 가까이 된 곳이거든요. 오래됐어요. 제가 찾아보니까 공동묘지 저 구석, 그러니까 주택가와 경계가 돼 있는 아주 구석에.
◇ 박재홍> 지금 사진이 나가고 있습니다. 우리 작가님이 찍으신 것 같아요, 그렇죠?
◆ 김동우> 저 비석입니다. 황기환 선생님의 비석. 대한인이라고 쓰여 있고 또 임국 5년이에요. 돌아가신 날짜를 그렇게 표기해요.
◆ 진중권> 임시정부?
◆ 김동우> 그렇죠. 19년부터 19년부터 1,2,3 해서. 그래서 그러니까 1923년도에 저기 묻히게 되시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게 되죠.
◇ 박재홍> 그러니까 결혼을 안 하셔서 가족이 없으셨는데 한인교회 목사님이 저 묘를 발견하셨다면서요.
◆ 김동우> 2008년도에. 뉴욕에 가면 뉴욕 한인교회라고 있어요. 이 교회도 뉴욕에서 한국 사람들이 3.1운동 2주년, 3주년. 기념식을 열거든요. 그 행사 뒤에 만든 교회예요, 한인교회가.
◇ 박재홍> 뼈대가 있는 교회군요, 저항력이 있고.
◆ 김동우> 그러니까 사랑방 같은 역할이죠. 독립운동의 어떤 공간으로서 역할을 했던 교회거든요.
◇ 박재홍> 교회가 이렇게 순기능을 한 적도 많습니다, 여러분.
◆ 김동우> 그럼요. 그래서 이제 담임목사였던 장철우 목사님이 예전 교회 명부를 보니까 황기환이라는 이름이 있는 거예요.
◇ 박재홍> 그 이름과 이 이름을.
◆ 김동우> 아셨던 거죠. 그래서 ‘황기환이 우리 교인이었어? 그러면 무덤이 어딘가에 있을 거다, 이 근처에. 한번 찾아보자’ 해서 청년들하고 무덤 찾기 봉사를 하신 거죠.
◆ 진중권> 무턱대고 가신.
◇ 박재홍> 공동묘지도 엄청 많을 거 아니에요.
◆ 김동우> 그렇죠. 그 당시에 어디어디에 묻혔는지 오래된 공동묘지들 찾아다니신 거예요.
◆ 진중권> 무턱대고. 우연찮게 지나가다가 우연히 ‘어 이거 뭐지?’ 그게 아니고.
◆ 김동우> 아니에요, 아니에요. 의도적으로 찾으신 거예요. 그러다가 황기환의 무덤을 다시 발견하게 된 거죠, 2008년도에.
◇ 박재홍> 목사님이 대단하시네요.
◆ 김동우> 대단하시죠. 그래서 제가 뉴욕 가서 ‘선생님 그때 찾을 때 기분이 어떠셨어요?’ 만나뵈어서 물어봤거든요. ‘너무 그건 말로 표현할 일이 안 되는 순간이었다’라고 하시더라고요.
◇ 박재홍> 할렐루야가 나왔겠는데요.
◆ 김동우> 그래서 저한테도 ‘내가 그걸 어딘지 가서 보여주겠다’라고까지 해 주시더라고요. 그래서 너무 연로하셔서 ‘목사님 위치만 알려주시면 제가 찾아가보겠다’ 해서 혼자 찾아가서 저 사진을 찍게 된 거죠.
◆ 진중권> 책 읽으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냐면 우리 왜 그런 얘기하잖아요. ‘옛날에 말이야, 일제시대 때니까 창시개명도 하고 대충 다 이렇게 산 거지 어쩔 수 없었던 거 아니야’ 이렇게 변명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여기 딱 보니까 애니깽이라 그러잖아요, 멕시코 이민 간. 그게 진짜 힘든 노동이거든요. 거의 착취 수준의 반노예 생활을 했던 그분들이 돈을 모아요. 그래서 독립자금으로 보내거든요. 그렇게 산 사람들도 있었다. 대단한 사람들 아니고 일반 사람들이었다.
◆ 김동우> 민초들이 모인 독립자금이 어떤 식으로 모아졌냐면요. 멕시코 얘기 나와서. 커피 안 먹기, 담배 안 피우기, 노름 안 하기. 이런 식인 거예요. 그러니까 실생활에서 할 수 있는 내가 절약할 수 있는 방법으로 독립자금을 모아요. 그런데 그 방식이 교회의 십일조 같은 방식이었어요. 월급도 얼마 받으면 십일조처럼 떼어놓고 그런 식으로. 그러니까 이름 없는 독립운동가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 박재홍> 그래요. 그래서 지금 이 각 나라. 지금 책에는 인도, 멕시코, 쿠바, 미국편으로 이렇게 다녀오신 건데 그러니까 유족이 있는 경우에도 이런저런 이유로 찾기 어려운 경우들이 굉장히 많다면서요?
◆ 김동우>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아들이 2명이면 큰아들은 한국으로 가는 거 찬성하고, 아니면 둘째아들은 반대하든가 이런 경우도 있고요. 제가 인터뷰를 해 보니까 돈을 달라는 경우도 있고 ‘한국 정부에서 이걸 돈 좀 줘야 되는 거 아니냐’ 이런 식으로 해서 또 안 되는 경우도 있고 여러 사유들이 있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제일 안타까웠던 나라는 쿠바였어요.
◇ 박재홍> 쿠바요?
◆ 김동우> 쿠바는 우리나라랑 수교를 맺어본 적이 없거든요. 그래서 학자들이 들어가서 이걸 체계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그런 기회가 없었어요. 그리고 시간이 너무 오래돼서 사람들 모습도 너무 많이 변했고 성도 다 변해버렸고 그래서 옛날 자료를 보고 어떤 이름이 나와서 이 사람한테 우리나라의 정부에서 포상이 나가면 그 포상증을 수여할 훈장을 수여할 후손을 못 찾는 거죠. 그런 상황이 돼 버렸어요, 쿠바는.
◆ 진중권> 안타깝네요.
◇ 박재홍> 황기환 선생님이 말씀하신 2008년인가요? 그때 10여 년 전에 발견한 건데 그럼 국내 송환까지 왜 이렇게 오래 걸렸던 겁니까?
◆ 김동우> 그러니까 이게 절차가 되게 복잡하더라고요. 자식이 없잖아요. 그렇다 보니 국가보훈처장의 이름으로 뉴욕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걸어야 돼요. 행정 절차의 그런 시간들이 필요하더라고요. 그래서 이걸 ‘우리나라 사람이니까 우리가 가져가겠소’가 그렇게 안 되더라고요. 무연고자 묘지니까 이걸 가져가려면 어떤 주소도 있어야 되는데 지금 황기환 선생님의 주소는 임시정부 기념관으로 돼 있어요.
◆ 진중권> 그런데 그 묘비는 같이 갖고 오든지, 아니면 놓든지. 묘비가 이게 또 역사가 있는 거잖아요.
◆ 김동우> 저도 그래서 그게 약간 고민인데.
◇ 박재홍> 황기환의 묘.
◆ 김동우> 저거를 다 가져오는 게 맞는 건지 아니면 뉴욕에 가는 한국 분들이 볼 수 있게 저기다 꾸며놓는 게 맞는 건지 그건 저는 좀 고민입니다. 어떤 게 맞는 건지.
◆ 진중권> 치워버리는 건 아닌 것 같아요.
◆ 김동우> 그럼요.
◆ 김성회> 현재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거예요?
◆ 김동우> 그것까지는 제가 확인을 못 해 봤어요.
◆ 김성회> 사실 이 일을 전담해서 하시는 공무원은 아니시니까. (웃음)
◆ 김동우> 지켜보겠습니다.
◇ 박재홍> 지금 열정은 국가보훈처장 수준이신 것 같습니다.
◆ 김성회> 그러니까요.
◇ 박재홍> 그래서 황기환 선생님 유해가 송환됐지 않습니까? 그럼 그 현장에 혹시 작가님이 가시거나.
◆ 김동우> 안 불러주더라고요. 보훈처에서.
◇ 박재홍> 안 불러주셨어요? 그러세요? 사진을 좀 찍게 해 주고 현충원에 안장되는 것을 역사적인 순간을 작가님 공유하셨으면 좋았을 텐데.
◆ 김동우> 나중에 한번 찾아뵙겠습니다.
◆ 진중권> 세계 곳곳에서 조직이 만들어지고 독립운동 자금을 대고 있는데 우리한테 미국 교포들의 활동은 그래도 꽤 많이 알려졌어요.
◆ 김동우> 대표적으로 그런 게 있죠. 우리 육군의 시작 하면 광복군을 떠올리잖아요. 충칭에서 만들어진 광복군. 그런데 그 정신적 뿌리는 신흥군이잖아요. 그런데 ‘우리 공군의 시작이 어디야?’라고 물어보면 사람들이 ‘공군의 시작? 어디지?’ 이렇게 돼더라고요. 캘리포니아입니다. 캘리포니아에서 우리 공군이 시작는데 1920년에 김종림이라는 분이 쌀농사로 돈을 되게 많이 버신 분이에요. 별명이 백미왕이었죠, 라이스킹. 어마어마하게 돈을 많이 벌었어요.
◇ 박재홍> 정말로 어마어마하게.
◆ 김동우> 그래서 그분이 돈을 다 대요. 그리고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총장이었던 노백린 장군이 당시 미국에 계셨거든요. 그분하고 합심해서 캘리포니아주 북가주 윌로우스라는 곳에 한인 비행사 양성소라는걸 만들어요.
◇ 박재홍> 책에 보면 비행장 사진도 찍으셨던 것 같아요.
◆ 김동우> 이게 지금 교육장 건물이 남아 있어요.
◇ 박재홍> 저 사진이 지금 나오는 사진이 교육장.
◆ 김동우> 맞습니다. 저게 실제 우리 학생들이 교육받았던 곳이에요. 노백린 장군이 저기서 학생들을 가르친 곳이에요. 대한민국 공군의 효시죠. 저기가.
◆ 김성회> 그럼 저기 모집은 미국에 있는 미주 한인들이 지원을 했던 경우들이겠네요.
◆ 김동우> 그렇죠. 그래서 저 학교 출신들이 나중에 실제로 우리나라 최초의 공군장교가 돼요. 임관이 돼요. 되게 중요한 곳인데요. 아직 우리나라 정부에서 저 부지를 매입을 못했어요. 그래서 좀 매입해서 저기를 기념관 같은 걸로 만들려고 미국의 교포들도 오랫동안 노력하고 그랬는데.
◆ 김성회> 현재는 그럼 그냥 사유지로.
◆ 김동우> 사유지로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 김성회> 건물을 허물지 않고 잘 놔둬야 되겠네요.
◆ 진중권> 정부에서 힘을 써야 될 것 같은데,자기들의 역사니까.
◇ 박재홍> 우리 진 작가님도 조종사시기 때문에.
◆ 진중권> 내가 저기 갔으면 나는 제일 먼저 지원했을 것 같습니다.
◆ 김동우> 힘 좀 써주십시오. 빨리 부지 매입해서 뭐라도 좀 해 놨으면 좋겠습니다.
◇ 박재홍> 당시 비행소 양성소 개교 행사에서 노백린 장군이 그렇게 얘기했대요. ‘독립 전쟁이 일어날 때 우리 공군이 일본에 날아가서 도쿄를 쑥대밭이 되도록 폭격하자’ 그런 연설을 하셨다고. 가슴 뛰는 얘기네요, 당시에는 정말로.
◆ 김동우> 그럼요. 당시에 왜 우리가 공군을 양성하려고 했냐면 가만히 보니까 일본은 육군 너무 세. 해군도 세잖아요. 그런데 상대적으로 공군 전력이 없었어요, 별로. 그래서 그 틈을 우리가 파고들 수 있겠다라고 판단을 한 거거든요. 그런 전략적 판단에 의해서 저기 미국 땅에다가 우리가 공군을 한번 양성해 보자 했던 거죠.
◆ 김성회> 편지나 주고받던 시절에 전 세계 한인들이 저렇게 연결이 돼서 서로 내용을 주고받고 돈을 모으고 비행장을 짓고 작전을 짜고 이랬던 게 참 어떤 면에서 놀랍거든요.
◆ 김동우> 그러니까요. 더 놀라운 얘기는 1930년대 서신 왕래로 쿠바에 천도교가 또 들어와요. 그래서 천도교 교회까지 세워져요. 왜냐하면 이게 민족교회가 더 맞다고 본 거든요, 쿠바에 있던 한인들이. 그러니까 그렇게 시간이 되게 오래 걸렸을 거 아니에요. 서신 왕래로 왔다갔다 걸리려면. 그래도 우리 조상들이 이렇게 전 지구적으로 한마음으로 독립운동을 했다는 거. 이게 되게 뭉클한 지점이더라고요.
◇ 박재홍> 그래서 쿠바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후손 중에 ‘헤로니모 임’. 영화로도 만들어지고 체게바라와 함께 또 혁명 과정에 인정받았던 분도 계시잖아요.
◆ 김동우> 그러니까 헤로니모 임이 누구냐면 임천택이라는 분이 있거든요. 임천택이 쿠바 천도교 종리원장이었어요. 그분의 장남이 헤로니모 임인데 그분이 체 게바라랑 같이 쿠바 혁명에 선봉에 선 거죠. 한인이 쿠바 혁명에 앞장섰던 사람이 있다는 거, 이것도 되게 흥미로운 지점이죠. 그래서 나중에 체 게바라가 산업부 장관이 되거든요. 그 밑에 국장이 헤로니모 임이었어요.
◆ 진중권> 그거하다가 장관 하다가 나는 적성에 안 맞아 그래서 산에 다시 들어가잖아요.
◆ 김동우> 맞습니다, 맞습니다.
◇ 박재홍> 멕시코 얘기를 해 보죠, 멕시코에서 우리 한인들이 독립운동 활동한 게 어떤 게 있었을까요.
◆ 김동우> 한인들이 4년 동안 계약 노동자로 가거든요. 1905년에 가요, 딱 한 번 제물포에서. 그런데 이거는 대한제국이 승인한 합법적인 일이 아니었어요. 불법적인 브로커가 들어와서 모객해서 데리고 나간 거거든요. 그래서 가서 4년 동안 거의 노예 같은 생활을 하죠. 당시 한인들의 몸값이 돼지보다 쌌다고 하니까.
그런데 4년 동안 자살하는 사람도 생겼고요. 도망치다 잡혀온 사람들도 생기고요. 막 그러다가 채찍을 맞는 사람도 생기고 아주아주 어렵게 4년 동안 견디죠. 그러고 나서 한인들이 조직을 하나 만드는데 대한인국민회라고 미국에서 1910년에 안창호 선생님의 공립협회 이런 것들이 합쳐지면서 대한인국민회로 재편되거든요. 그게 지방회로 생겨요. 그 지방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해나가시는데 심지어는 승무학교라고 독립군 양성학교까지 만듭니다.
◇ 박재홍> 멕시코에다?
◆ 김동우> 멕시코에다가 1910년에. 그런데 멕시코에서 만들면 싸울 수가 없잖아요, 일본하고. 그래서 돈을 또 모금 활동을 해요. 장차 길러진 학생들을 연해주로 보내야 된다. 그러려면 배삯이 있어야 되지 않겠냐. 대단한 사람들이죠.
◇ 박재홍> 그러니까 일제강점기 때 해외에 퍼진 디아스포라들이 어떤 독립의...
◆ 김동우> 이민자들은 나라를 떠났지만 한 번도 나라를 잊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에요.
◆ 진중권> 도산 안창호 선생이 미국에 계시다가 또 방문하지 않습니까? 방문했던 호텔이 아직도 있더라고.
◆ 김동우> 1917년에 1918년 넘어가는 사이에 한 10개월 동안 멕시코를 순회하거든요. 그래서 멕시코에 있던 한인들 기억 속에는 도산 안창호가 제일 추앙받는 인물인 거예요. 거길 찾아온 독립운동가가 도산밖에 없어요. 그래서 한인 마을을 다 찾아다닌 거예요. 그러다 미국으로 갈 때 비자가 또 잘 안 나와요. 그러다가 과달라하라라는 곳에 가서 그 호텔에 머물렀다는.
◆ 진중권> 왜냐하면 비자가 일본 비자여야 되기 때문에.
◆ 김동우> 맞습니다.
◆ 진중권> 그분이 그걸 거부했기 때문에.
◆ 김동우> 그래서 그 호텔에 가면 과달라하라에 가면 프란세스 호텔이라고 있는데 거기 가면 도산 안창호가 머문 호텔이라고 동판이 붙어 있습니다.
◇ 박재홍> 그렇군요. 작가님은 그 많은 현장을 어떻게 다 혼자 다니셨어요?
◆ 김동우> 버스 타고 기차 타고.
◆ 진중권> 버스 12시간 타고.
◆ 김성회> 천박하게 ‘무슨 돈으로 다니셨냐’라고도 물어보고 싶어요. (웃음)
◇ 박재홍> 제가 드리고 싶은 질문을 김성회 소장님께서 하셨는데.
◆ 김동우> 이거 처음 할 때는 제가 무명이고 저를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죠. 그런데 긴 여행이었고 해서 처음에는 집을 하나 처분하고.
◆ 진중권> 집 한 채가 날아간 책이군요.
◆ 김동우> 집 한 채가 날아가는 작업이죠. 그런데 그걸 팔 때는 부동산이 이렇지 않았거든요. (웃음)
◇ 박재홍> 갑자기 막 올라버렸어요.
◆ 김동우> 몇 년 또 고생하면. 그래도 좀 다시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했는데 이제 팔려고 그러면.
◆ 진중권> 다시 정치 문제로 돌아왔어.
◆ 김동우> 지금 하라면 못 할 것 같아요.
◇ 박재홍> 이제 인도, 멕시코, 쿠바, 미국편 나오셨는데 그럼 다음 편에는 어떤 편이 또 예정돼 있을까요?
◆ 김동우> 지금 다음 책을 쓰고 있는데요. 연해주하고 중아시아 얘기.
◇ 박재홍> 좀 더 친숙한 얘기가 될 수도 있겠네요.
◆ 김동우> 그렇죠. 가까이 있으니까요. 안중근 의사 얘기도 나올 거고요.
◆ 김성회> 그걸 많이 하시려면 ‘뭉우리돌의 바다’가 많이 팔려야겠네요.
◆ 김동우> 많이 팔아주십시오.
◆ 진중권> 진짜 재미있습니다, 이 책. 진짜 시각적으로도 너무 화려하고요. 그러니까 화려하다라기보다는 너무 인상적입니다. 하여튼 꼭 권합니다.
◇ 박재홍> 진 작가님의 생방송 추천사까지. 뭉우리돌의 바다를 펴낸 사진작가 김동우 씨였습니다. 고맙습니다.
◆ 김동우> 감사합니다.
"인터뷰를 인용 보도할 때는 반드시 프로그램명을 밝혀주십시오."
- CBS 라디오 <박재홍의 한판 승부>
4/20(목) "당신이 몰랐던 미스터 션샤인, 황기환 선생 이야기"
2023.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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