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뷰를 인용보도할 때는
프로그램명 'CBS라디오 <박재홍의 한판승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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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송 : CBS 라디오 <박재홍의 한판승부> FM 98.1 (18:00~19:30)
■ 진행 : 박재홍 아나운서
■ 패널 : 진중권 작가, 김성회 소장
■ 대담 : 김대진 한예종 총장
◇ 박재홍> CBS 라디오 박재홍의 한판승부 함께하고 계십니다. 피아니스트 임윤찬, 손열음, 배우 김고은, 변요한, 이선균, 영화감독 나홍진. 우리나라 문화예술을 대표하는 스타들의 이름인데요. 이들의 공통점 혹시 아십니까? 바로 한국예술종합학교 한예종 출신이라는 건데 글로벌 예술인재의 산실인 한예종이 벌써 30주년을 맞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유명 피아니스트이시고 지휘자이기도 한 한예종의 김대진 총장을 모시고 말씀 나누겠습니다. 총장님, 어서 오십시오.
◆ 김대진> 안녕하십니까?
◇ 박재홍> 진 작가님, 김성회 소장님과도 인하사시고요.
◆ 진중권> 안녕하세요.
◇ 박재홍> 감사합니다, 나와주셔서.
◆ 김대진>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 박재홍> 지난주에 한예종이 개교 30주년을 맞아서 기자간담회도 가지셨습니다. 총장님 소회가 어떠신가요?
◆ 김대진> 글쎄요, 진짜 앞만 보고 달려온 30년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제 막상 학교 일을 맡고 나서 그런 기자회견도 하고 여러 행사를 준비하다 보니까 참 굉장히 파란만장한 그런 시간을 우리가 지내왔구나라는 게 어떻게 새삼스럽게 느껴지고요. 사실 평교수 입장이었다면 더 그 기분을 만끽할 수 있을 것 같은데.
◇ 박재홍> 총장이시니까.
◆ 김대진> 학교 일을 하다 보니까 또 여러 가지 준비해야 되고 또 앞으로 우리 처음에 초대 총장님이 그렇게 수립하셨던 어떤 큰 그림을 과연 제가 그릴 수 있을까라는 그런 사실은 부담감과 책임감이 훨씬 지금 크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 김성회> 총장님께서는 한예종에 언제부터.
◆ 김대진> 93년에 제1원으로서 음악원이 개원했었고요. 저는 94년에 음악원 교수로 부임했었습니다.
◆ 진중권> 서초동에 있었죠?
◆ 김대진> 그렇죠. 서초동에. 지금도 서초동에 있습니다.
◆ 김성회> 30년 중에 29년을 함께하신. 진짜 말 그대로 상징이신.
◆ 김대진> 흔히들 예종맨이라고 부릅니다.
◇ 박재홍> 예술이다 이 슬로건을 말씀하셨어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 김대진> 슬로건을 우리가 만들려고 할 때 아니, 행사 자체를 학생들이 참여하는 행사로 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슬로건을 사실은 학생들한테 공모를 했어요. 그래서 여러 가지 좋은 슬로건이 나왔는데 그중에서 그 예술이다라는 게 당첨이 됐는데. 예술이 하고 콤마가 있고 다. 그렇죠? 그래서 굉장히 중의적인 의미가 있다고 만든 학생들이 설명을 하는데 본인들이 추구하는 본인들이 좇고 있는 길의 정답은 예술이 정답이다라는 의미와 또 우리가 하는 모든 것들 중에서 예술이 전부 다다라는 그런 중의적인 의미로 쓰였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이제 여러 가지 안을 놓고 심사하는 과정에 다 교수님들과 직원분들이 이게 너무 좋은 것 같다.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고. 지금 현재 학생들이 생각하고 있는 어떤 가치를 잘 표현해 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 박재홍> 한예종 출신이 받은 상 회수가 4224회에 달한다. 엄청나네요. 그중에 1등만 1316번. K-컬처에 K-예술 한예종이 주도했다 이런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총장님도 동의하십니까?
◆ 김대진> 이제 어떤 것을 주도했다라는 것은 그 시대에 요구하는 것을 부합했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저희가 30년 전에 개원해서 한예종이 어떤 학교고 어떤 예술가를 길러내는 학교인가를 증명해야 되는 사실 시기가 있었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런 면에서는 이런 어떤 수상 실적이 굉장히 큰 역할을 한 게 사실이고 또 이런 수상으로 인해서 세계에서 한국 영재들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한예종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 건 사실인데 그것이 목표는 아니겠죠.
◇ 박재홍> 수상이 목표는 아니다?
◆ 김대진> 수상이 예술에서 상을 받는다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라고 생각했는데 다만 이제 학교가 초창기에 설립이 되고 지금까지 오는 과정에서 그 수상은 굉장히 큰 의미를 부여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 김성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볼 때는 한예종 하면 뭔가 되게 다른 사람이다.
◇ 박재홍> 특별한.
◆ 김성회> 연기를 하는 분도 그렇고 음악을 하는 분도 그렇고 그렇게 약간 압도하는 기분이 느껴지곤 하는데 학생들을 어떻게 그렇게 잘 뽑을 수 있었던 걸까요?
◆ 김대진> 그것이 이제 초창기에 초대 총장님이 그려놓은 비전하고도 굉장히 부합하는 면이 있는데 초창기에는 입시 방법이 굉장히 달랐죠. 그래서 음악원을 예를 들자면 그전까지는 이렇게 가림막을 치고 연주를 듣고 평가를 했다면 일단 가림막 자체가 없었어요. 그래서 실질적으로 저 앞에서 연주하는 학생을 보고 듣고 평가를 했었고. 이제 미술원 같은 경우는 살아 있는 동물을 풀어놓은 적도 있었죠.
◇ 박재홍> 그려보라 하는 것에 대해서?
◆ 김대진> 그렇죠. 왔다 갔다 하는 그 상황을 이제 그림으로 그려야 되는 그런 어떤 선발 방법에서의 기준이 조금 그때까지 왔던 그런 방법하고 조금 달랐죠.
◆ 진중권> 입시가 아니라.
◆ 김대진> 어떤 하나의 작품 활동을 보는 것이고 이제 그런 작품 활동을 보는 것에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상상력이 어느 정도 있을까 하는.
◇ 박재홍> 그러니까 연주하는 장면도 가림막을 보면 불완전하게 판단할 수 있기 때문에 연주하는 모습 자체도 판단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인 거죠?
◆ 김대진> 그렇죠. 연주 입장에서 보면 악기와 자기가 얼마나 지금 일체감이 되어 있느냐를 보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그런데 이제 그런 것을 볼 수 없는 상황에서 그런 것을 보고 뽑을 수 있었다는 게 굉장히 큰 역할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 박재홍> 피아노와 하나가 되는.
◆ 김대진> 악기와 하나가 되는.
◇ 박재홍> 그래요. 그런데 이제 한예종이 처음에는 예술의전당에 세 들어 살았다면서요? 발전 과정 여러 가지 지금까지 많은 이야기가 있을 것 같은데.
◆ 김대진> 처음에는 건물도 없었고 세 들어 살았고. 학교에는 식당도 없었고 그래서 점심시간이 끝나가면 뭡니까? 연구실 앞에 배달 철가방이 다 나열이 돼 있는 그런 진풍경이.
◇ 박재홍> 식사를 못하니까.
◆ 김대진> 식당이 없으니까.
◇ 박재홍> 식당이 없으니까?
◆ 김대진> 그런 것으로 시작이 됐고.
◇ 박재홍> 중식을 많이 드셨군요.
◆ 진중권> 시킬 때가 거기밖에 없는 거 같은데. 배달해 주는 데가.
◆ 김성회> 그때는 배달의민족이 없을 때죠.
◇ 박재홍> 없죠, 없죠.
◆ 김대진> 그리고 저는 하필 연구실 문 바로 열면 복도에 비가 새서 양동이를 갖다놓고 그 양동이. 제 연구실 앞에 있으니까 그것을 버리는 것은 제 책임이었는데. 그런 과정이 있었는데 사실 어떻게 보면 지금 참 아름다운 추억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이 듭니다.
◆ 진중권> 애초에 어떻게 탄생했나요? 왜냐하면 그전에도 사실 대학에 미대가 있었고 음대가 있었는데 특별하게 예술학교를 만들겠다. 어떤 구상이 있었을 거 아니겠습니까?
◆ 김대진> 초대 총장님의 구상은 그냥 이런 어떤 스튜디오 안에서 이루어지는 예술교육이 아니라 어떻게 보면 예술교육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죠. 무대 위에서 이루어지는 그런 과정을, 교육을 하는 것이 사실은 어떻게 보면 산교육이라고 생각을 하셨어요. 그래서 다들 외국에서도 관심이 있으신 부분이기는 한데 뭔가 커리큘럼이 특별한 게 있느냐 이제 이런 말씀들을 하시는데 초대 총장님이 저희들이 당시에는 모여서 사실 몇 날 며칠을 밤을 새고 어떤 커리큘럼을 만들면 좋을까 고민을 많이 하고 있는데 총장님이 오셔서 그랬어요. 이거 생생히 제가 기억하는 장면인데 며칠 밤을 연구해서 좋은 거 많이 만들어봐라. 그런데 진짜 중요한 것은 눈에 안 보이는 커리큘럼이다라는 말씀을 하고 나가셨거든요. 그 이야기는 무엇이냐 하면 교수님들이 실질적으로 연습도 하고 교수님들이 작품 활동을 하고 교수님들이 무대에 올라서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큰 학생들에게는 동기부여고 영감을 주지 않는 것이냐라고 이제 말씀을 하셨다고 생각이 돼요.
◇ 박재홍> 보이지 않는 커리큘럼.
◆ 김대진> 보이지 않는 커리큘럼, 그 히든 커리큘럼이라고 그러죠. 그 표현을 아직까지 굉장히 많이 지금 또 화제에 오르기도 하고 교내에서. 어떻게 하면 그런 분위기를 교수들이 만들어 나갈 수 있을까에 대해서 굉장히 사실은 아직도 초대 총장님의 말씀이 아직도 저희 모든 교수들 마음에 굉장히 큰 울림을 울리고 있습니다.
◇ 박재홍> 가장 보람된 순간은 아마 제자들 잘 되는 모습 보실 때. 우리 총장님 제자가 손열음 씨, 김선욱 씨, 문지영 씨 등이고 또 임윤찬 씨 스승인 손민수 씨 스승이네요. 그러니까 거의.
◆ 진중권> 할아버지.
◇ 박재홍> 할아버지이신데. 어떠세요? 제자들의 활약을 보시면.
◆ 김대진> 그 학생들은 사실은 어디서 배웠든지 크게 될 학생이었습니다.
◇ 박재홍> 천재였군요.
◆ 김대진> 그만큼 잠재력이 많았고 출중한 학생들이었기 때문에 꼭 저한테 뭔가 특별한 지도를 받아서 이렇게 됐다고 생각해 본 적은 사실 한 번도 없고.
◇ 박재홍> 스승이 이렇게 겸손하시면.
◆ 김대진> 겸손한 게 아니라 사실은 저는 겸손한 거 잘 모르는데...
◇ 박재홍> 모르시는구나.
◆ 김대진> 모른다기보다 사실은 사실대로, 사실은 사실대로 이야기해야 되는 그런 입장이기 때문에 그래서 제가 입버릇처럼 이야기하는 게 선생으로서는 굉장히 운이 좋았다는 표현을 많이 쓰는 게 그게 제 진심으로 사실은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고요. 다만 뿌듯해지는 것은 오히려 이제 그들이 졸업하고 나가서 한 연주자로 성장하고 성장된 모습. 요즘 연주하는 그런 모습을 보면 그거는 사실 조금 뿌듯해지는 면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학생 때 재주 있다고 평가를 받고 실질적으로 수상도 많이 하고 그러고 졸업하고 나가서 기대만큼.
◇ 박재홍> 활동을 못하는 경우도?
◆ 김대진> 잘 뻗어나가지 못하는 경우도 사실은 있거든요. 이제 그들을 봤을 때는 계속 꾸준하게 자기만의 세계를 그려나가는 모습이 확실히 느껴지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제 선생의 입장에서는 모르겠습니다. 이거야말로 저 혼자의 자화자찬일지 모르겠는데 그렇게 자기 세계를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어떤 기본 틀을 마련해 준 것이 아닐까.
◇ 박재홍> 저희가 그게 궁금해요. 사실은 천재들은 예술가들은 하나의 시스템 안에 어떤 박스 안에서 규격화될 수 있는 분들이 아니잖아요.
◆ 김대진> 아니죠. 그래서 굉장히 힘들어하는 경우도 많이 있었고 사실은 악마쌤, 호랑이 선생님 이런 얘기를 굉장히 많이 들었는데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 박재홍> 총장님이 악마 선생님이셨어요? 호랑이 선생님이기도 하시고.
◆ 김대진>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어떤 굉장히 개성이 담긴 작품, 어떤 큰 틀 안에 들어갔을 때 그게 개성이라고 여겨지는 것이고 그 큰 틀을 벗어나게 되면 그것은 다름이라는 표현을 쓰는 거거든요. 그런데 그것이 다름이 아니라 개성이라는 이 틀 안에 들어올 수 있게 된 것이 굉장히 사실은 다행스럽고 뿌듯하게 생각합니다.
◆ 진중권> 김선욱 씨라든지 손열음 씨도 엉엉 울었다고.
◆ 김대진> 이제 밝히기 좀 그런 사실인데 영재들의 특징이 연습을 잘 안 합니다.
◆ 진중권> 재주만 믿나?
◆ 김대진> 재주가 있으니까 오랜 시간 악기 앞에 앉아서 연습을 하고 하는 과정이 본인들한테는 고통스러운 거죠. 그래서 또 연습을 하더라도 당장 다음 주에 다음 주에 연주할 곡은 다른 게 있는데 다른 걸 연습을 한다든지.
◆ 진중권> 자기가 하고 싶은 거?
◆ 김대진>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고. 그러니까 정말 자유로운 영혼들 아닙니까?
◇ 박재홍> 자유로운 영혼 좋은 표현입니다.
◆ 김대진> 그런 아이들을 그래도 어떤 시스템 안에 딱 들어오게 하려면 사실은 무섭게 할 수밖에 없었던 그런 경우도 있고. 그래서 본인들은 굉장히 고통스러웠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진중권> 요즘 임윤찬 있지 않습니까? 보통 클래식을 모르는 사람들도 요즘은 그냥 그 영상이 너무 강렬했나 봐요.
◆ 김대진> 그렇죠, 그렇죠.
◆ 진중권> 그널 너무나 많이 돌려봤는데 어떻게 학생 시절에 보셨죠, 연습할 때?
◆ 김대진> 이제 윤찬이 경우는 또 앞선 선배들, 영재 선배들하고는 조금 다른 케이스인 것 같아서요. 그래서 앞선 선배들은 어렸을 때부터 굉장히 두각을 많이 나타낸.
◇ 박재홍> 어릴 때 5살, 6살.
◆ 진중권> 싹이 보였죠, 이미.
◆ 김대진> 누가 들어도 이미 재주가 있다라고 생각한 그런 경우였고 윤찬이 경우에는 이제 그게 굉장히 내재되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오늘 여기 나온 김에 사실은 기밀을 하나 누설하자면.
◇ 박재홍> 그런 거 좋아합니다.
◆ 김대진> 어렸을 때는 국내 콩쿠르에서도 예선에서도 탈락하고 심지어 제가 심사했던 국내 콩쿠르 그렇게 큰 콩쿠르 아니었는데 예선에서 떨어지기도 하고 그랬었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재교육원 시험 볼 때도 저희들이 느낀 게 분명히 뭐가 있을 것이다. 분명히 뭐가 지금 발현이 잘 안 되는 뭐가 막혀 있는 그런 상황이지.
◇ 박재홍> 진맥을 해 보시니까?
◆ 김대진> 분명히 뭐가 있을 것이다라는 판단을 하게 됐는데 이제 그래서 손민수 교수하고 5년 공부했죠. 그런데 아닌 게 아니라 그게 터져 나온 거였어요. 그래서 우리가 이제 흔히들 아는 영재들 그러면 어렸을 때부터 굉장히 두각을 나타내는 이렇게 생각을 하는데 그게 아닌 경우도 있구나라는 것을 저희 가르치는 선생들 입장에서는 사실 윤찬이 경우를 통해서 굉장히 많은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재 그러면 영재가 워낙 많이 나왔기 때문에 그 나온 영재들이 보여줬던 어떤 과정이 선생들한테도 이미 그것이 조금 고착화돼 있지 않았을까.
◆ 진중권> 패턴화 됐고.
◆ 김대진> 그걸 완벽히 이번에 깨뜨린 경우였어요.
◆ 진중권> 그래도 선생님으로서 봐낸다는 게.
◇ 박재홍> 알아보신 선생님이 대단한 거고 기다려주신 선생님 대단합니다.
◆ 김대진> 그리고 특히 그것을 담당했던 손민수 교수께서 그것을 꾸준히 계속 같은 길로 꾸준히 정진했다는 것이 사실은 어떻게 같은 길로.
◇ 박재홍> 손민수 선생님의 스승이 총장님이시고요. 깔때기네요. 그런데 연극원 1기로 입학하신 분이 장동건 씨라고 하는데 당시 활동 규정이 너무 엄격해서 자퇴를 했다 지금도 그렇습니까?
◆ 김대진> 지금은 이제 1, 2학년 때는 활동을 못하게...
◇ 박재홍> 연기를?
◆ 김대진> 외부활동. 이제 단역이라고 표현할까요. 그런 건 하는데 주연이나 그런 걸 맡아서는 활동을 못 한다는 건 사실 1, 2학년으로 제한이 돼 있고 사실 저도 일 맡고 나서 그걸 어떻게 다시 한 번 재고해 볼 수 없을까 해서 연극원 교수님들하고 굉장히 토론도 많이 하고 그랬는데 제가 설득당할 정도로 확실한 이론이 있으세요. 일단 연극원에 한 학년에 연기과가 30명밖에 없습니다. 이번 경우도 사실은 제 기억이 맞다면 5000명 정도 지원을 했는데.
◆ 진중권> 5000명.
◆ 김대진> 거기서 이제 30명을 뽑는단 말이죠.
◇ 박재홍> 5000명 중에 30명.
◆ 진중권> 지원한 애들도 쟁쟁한 애들이 지원하겠지.
◆ 김대진> 그런데 이제 연극원 수업이라는 게 음악원 수업처럼 개인 지도하는 것도 있지만 사실은 단체로 그룹으로.
◇ 박재홍> 팀워크.
◆ 김대진> 팀워크를 활용을 해서 해야 되는 교육이 대부분인데 거기서 이제 이탈하기 시작하면 주연을 맡으면 거의 몇 개월 정도는 수업을 이탈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이렇게 되면 사실은 그거는 수업을 운영하는 데 굉장히 큰 지장이 있다라는 것은 사실은 저도 교수, 지금은 교수가 아니지만 교수였기 때문에 그건 제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고 그리고 이 학생들의 어떤 아까 제가 말씀드렸던 음악원 경우에 그런 연주의 틀을 마련을 한다는 것은 꼭 굳이 음악원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모든 원에도 다 해당이 되는데 그것뿐만 아니라 이제 나가서 연기를 한다는 것은 어떤 자유롭게 연기하는 것보다는 기획사하고 연관이 된다든지 어떤 또 시스템하고 또 연결이 되지 않습니까? 그런 시스템을 잘 받아들이고 소화를 하고 수용할 건 수용하고 또 이야기할 건 이야기해야 하는 그런 어떤 정신적인 그런 준비 과정도 필요하다는 말씀이세요. 저는 그 부분에서 내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 바로 이런 부분이 있었구나라고 이해를 하게 돼서 그리고 이제 연극원 교수님들도 말씀이 그런 시스템을 다 1, 2학년 때는 활동 못 하고 다 학교 내규를 따라서 하고 나서도 훌륭하게 되는 연기자들이 굉장히 많이 있기 때문에 사실 길게 놓고 보면 2년이라는 시간은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니니까 어떻게 보면 더 크게 날기 위해서 준비하는 기간으로 이해해 주면 좋겠다라는 말씀에 사실은 저도 공감을 했습니다. 학기 초에, 원 개원 초에는 전 학년이 그렇게 되어 있었어요. 그랬는데 일정 부분 수용해 주신 것도 있었고 2학년 때까지는 그렇게 돼 있다.
◇ 박재홍> 이제 초대 총장인 고 이강숙 총장께서 한예종 세우시면서 유학 안 가도 콩쿠르 1등하는 학교 만들겠다. 소위 줄리어드 안 가도 이런 말씀이신 것 같은데 지금은 이제 보면 실현됐다고 볼 수 있습니까?
◆ 김대진> 정확한 표현은 유학 안 가도 되는 학교를 만들겠다고 표현을 하셨어요.
◇ 박재홍> 유학 안 가도 되는 학교.
◆ 김대진> 되는이 과연 무엇이냐. 그럼 이 되는 것을 어떻게 우리가 증명을 해야 되는 것이냐라고 봤을 때 아까 제가 서두에 말씀드린 대로 콩쿠르 수상 그것이 일정 부분 학교에 도움이 됐다고 생각을 하고 있고요. 참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는데 나름 이제 저희 학생들도 콩쿠르에서 수상을 많이 했는데 저는 아직도 이제 그것에 대해서 콩쿠르를 나가는 것이 좋은 것인가라는 이제 그런 말씀을 드리기도 하거든요. 그러면 조금 제 이야기를 오해를 하셔서 뭔가 자랑하려고 저러는 게 아니야라고 말씀을 하실 정도인데 사실은 지금 현재 콩쿠르라는 것은 콩쿠르의 의미가 조금 퇴색된, 변질된 그런 게 있는 거죠. 왜냐하면 그 많은 옛날에는 사실은 많은 재주 있는 연주자들이 어떻게 자기를 알릴 방법이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예를 들어 자기가 예를 들어 이쁜 장갑을 떴는데 이걸 나만 갖고 있기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하고 공유하려면 시장이 모인 곳에 이것을 들고 갈 수밖에 없지 않았습니까? 그거랑 마찬가지로 이제 자기의 어떤 존재를 알리기 위해서는 콩쿠르에 나가는 것이 맞다라고 생각이 됐었고 그 당시에는 1등, 2등, 3등 그런 구별도 없었고 콩쿠르에서 입상을 했다는 것은 그만큼 인정받았다 이렇게 되는 거겠죠.
◇ 박재홍> 알겠습니다. 총장님을 보내드릴 시간이 돼서 너무 아쉽네요. 1시간을 모셔야 하는데.
◆ 김대진> 말을 많이 했는데.
◇ 박재홍> 아닙니다, 아닙니다. 총장님, 앞으로의 계획 짧게 말씀해 주시고 이번에 이태원 참사를 추모하는 곡을 청취자들과 함께 들을 수 있는 곡을 추천해 주신다고 하셔서 그 두 가지 말씀 간단히 듣고 마무리하겠습니다.
◆ 김대진> 이제 30년이 지났으니까 또 어떤 새로운 30년을 계획해야 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고요. 그리고 예술가의 상은 예술가 자신이 정하는 것도 있지만 어떤 그 시대가 요구하는 요구도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이제 그 시대에 부합하는 어떤 예술 작품을 만들어내는 의무가 저희들한테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 옛날에 어떤 모범적이고 객관적인 그런 연주를 선호했다면 이제는 그거는 지루하다. 더 이상 그런 연주는 그래서 이걸 보고 예측될 수 있는 연주라고 표현이 되는데. 예측될 수 있는 연주는 필요 없다. 우리를 놀라게 해 달라. 이제 그 얘기는 뭐냐 하면 결국에는 개성과 창의성이 필요하다는 얘기거든요. 개성과 창의성을 가르칠 수 있을까 하는 문제가 있는 것이고 그것을 하기 위해서 심화과정을 만들어야 돼서 저희도 지금 현재는 각종 학교로 묶여 있기 때문에 석사, 박사. 석사는 인정 못하고 박사 과정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런 과정을 만들어서 심화과정을 만들어서 그런 창의력 있는 인재를 만들어야 되는 그런 숙제를 안고 있습니다.
◇ 박재홍> 알겠습니다. 추천곡 듣고 마무리하겠습니다.
◆ 김대진> 사실은 여러 곡이 있는데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가 가장 우리의 뜻을 애도의 뜻을 잘 나타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서...
◇ 박재홍> 이 곡 듣고 마무리합니다. 한예종의 김대진 총장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 김대진> 감사합니다.
"인터뷰를 인용 보도할 때는 반드시 프로그램명을 밝혀주십시오."
- CBS 라디오 <박재홍의 한판 승부>
11/8(화) 김대진 "유년기엔 콩쿨 탈락 임윤찬, 하지만 뭔가 달랐다
2022.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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