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뷰를 인용보도할 때는
프로그램명 'CBS라디오 <한판승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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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송 : CBS 라디오 <한판승부> FM 98.1 (18:25~20:00)
■ 진행 : 박재홍 아나운서
■ 패널 : 진중권 작가, 김성회 소장
■ 대담 : 경기대 건축학과 안창모 교수
◇ 박재홍> 한판승부 함께하고 계시고요. 오늘 굉장히 재미있는 시간 준비했습니다. 청와대가 시민들에게 개방된 지 한 달이 다 돼 가는데요. 이번 주 일요일부터, 주일부터는 하루 관람인원은 4만 9000명으로 늘린다고 하네요. 그래서 오늘은 청와대와 얽힌 역사, 건축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또 가장 잘 말씀해주실 수 있는 분을 모셨어요. 안창모 경기대 건축학과 교수님 모셨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교수님.
◆ 안창모> 안녕하십니까?
◆ 진중권> 안녕하세요.
◇ 박재홍> 김 소장과 인사 나눠주십시오. 청와대 자리가 고려시대 때부터 역사가 있었다고 하던데 어떤 곳이었고 어떻게 변해 왔는지 간단히 말씀해주시면.
◆ 안창모> 사실 청와대 터에 한정해서 이야기하니까 고려시대 역사의 이궁터 얘기만 하지만 사실은 고려 때 한성부. 서울의 이전 명칭 한성부죠. 한성부가 시작된 곳이 고려 때 남경이라는 곳이었는데, 정확하게 남경의 위치가 어디였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역사학계에서는 정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습니다.
◇ 박재홍> 논쟁 중이군요.
◆ 안창모> 그래서 다만 지금 현재 교동이라는 지명이 있는 곳 그 다음에 전체 위치로 봤을 때 지금 청와대 터 정도가 아마 남경의 영역이었음은 확실하다 이런 정도였기 때문에 그중에서도 지대가 가장 좋고 높은 곳에 이궁이 있지 않았겠나라고 해서 거기가 이궁터로 가장 유력하게 이야기가 되고 있는 곳이죠.
◇ 박재홍> 그렇군요. 이게 또 청와대 그쪽이 경무대라고도 했다고 하는데.
◆ 진중권> 옛날 이승만 대통령 때는 경무대라고 하지 않았나요.
◆ 안창모> 그렇습니다. 경무대라는 이름 때문에 여러 가지 논란이 많고 이름의 적절성부터 여러 가지가 있는데, 사실 경무대라는 이름은 조선시대에는 없었던 이름입니다. 그냥 경복궁의 후원일 뿐이었고요. 경무대라는 이름이 처음 나온 것은 고종 때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실록에 처음으로 경무대라는 이름이 나오게 되고요. 경무대라는 이름에는 나와서 그것이 굉장히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거기에 들어섰던 지어졌던 건물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건물이 육문당과 육무당인데 그 단어의 의미를 좀 살펴볼 필요가 있죠.
◇ 박재홍> 어떤 의미가 있나요?
◆ 안창모> 무를 융성하게 하고 문을 융성하게 한다는 거죠. 그런데 보통 우리가 청와대 이야기를 하면서 그 터만 가지고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그림을 작게 보는데 사실은 문과 무를 바르게 세워야지 서로 견제와 균형을 하면서 나라가 바로 선다는 것은 이것은 고종 때 이야기뿐만 아니라 조선이 처음 시작됐을 때부터 이미 시작됐던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예조가 있었던 터를 예조를 옮기고 그 자리가 삼군부를 복원하잖아요. 그 다음에 의정부를 원래 기능을 회복시키고. 그러니까 삼군부와 의정부는 조선이 문과 무가 바로 서서 나라의 틀을 바로잡겠다는 그런 의지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고종 때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문과 무의 상징인 의정부와 삼군부를 복원한 것과 함께 사실은 경무대의 육문당과 육무당을 만들고 그 자리에서 과거 시험을 굉장히 많이 봤는데 그 모든 과거시험의 대부분의 과거시험에 고종이 직접 친림을 해서 문제를 내고 지켜봅니다.
◇ 박재홍> 굉장히 부담스럽네요. 요즘으로 치면 대통령이 문제를.
◆ 안창모> 그런 건데 그만큼 고종이 인재 양성에 굉장히 공을 들였다는 이야기고, 거기 청와대 가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거기서 약간 구릉을 올라가면 거기서 앞에 서울, 한양 도성이 내려다보이고 멀리 관악까지 보이는 그 정면은 아마 국가 경영을 위한 큰 그림을 그리는 장소로 굉장히 근사했을 겁니다. 그래서 당시에 굉장히 어려웠던 안팎으로 어려웠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고종이 어떤 의지를 가지고 경복궁을 중건을 했고 거기서 어떠한 그림을 그렸을까를 생각하기에 청와대 지금 현재 터만큼 중요한 곳이 없죠.
◆ 진중권> 이승만 대통령이 그때 사셨던 곳은 어디인가요, 그러면?
◆ 안창모> 이승만 대통령이 사셨던 곳은 지금 철거한 옛날 총독 관저. 총독 관저가 1939년에 지어지잖아요.
◆ 진중권> 그 위치가 어디죠?
◆ 안창모> 지금 보면 관저하고 청와대 집무실 그 사이에서 약간 아래쪽. 지금 터가 가서 보면 표지석 것이 남아 있습니다.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데.
◇ 박재홍> 청와대 터 근처기는 맞는데. 영역 내에 있는데.
◆ 안창모> 그 영역 내에 있습니다. 바로 경무대가 굉장히 좋은 뜻을 가지고 만들어지던 곳인데 이승만 대통령의 장기 집권과 독재의 상징과 결부되면서 경무대가 우리한테 굉장히 안 좋은 이미지.
◆ 진중권> 그러니까 총독 관저를 거기다 일본인들이 세우고 거기를 들어가셔서 그걸 경무대라고 부르셨던 건가요?
◆ 안창모> 그렇죠. 사실은 해방이 되고 났을 때 그 자리는 처음에는 하지 중장이 자신의 관저로 사용했었고. 그런데.
◆ 진중권> 미 군정청이구나.
◆ 안창모> 그렇죠. 미 군정청이 총독부 건물을 다 인수를 했었으니까. 그랬다가 나중에 민정에 이양되면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이승만 대통령의 관저로 사용이 된 거죠.
◇ 박재홍> 청와대가 시민들에게 개방이 되면서 유튜브로 보시는 분들은 시민들이 줄서서 관람하면서 보고 계시는데, 지금 화면상에 유튜브로 파란 기와집 보이는 저 청와대 본관 건물인 것 같은데 언제 그럼 저게 지어진 겁니까?
◆ 안창모> 저 건물이 지어진 건 1990년이죠.
◆ 진중권> 그전에도 청와대가 있었지 않습니까?
◆ 안창모> 청와대라는 이름이 있었죠. 그게 사실은 굉장히 핵심적인 부분인데 경무대라는 이름이 이승만 대통령의 장기집권과 함께 독재의 이미지가 워낙 강하니까 당시에 민주정부라고 생각했었던 윤보선 대통령 입장에서는 그런 이미지에서 벗어나고 싶은 거죠. 그래서 역사적인 이름이지만 그 이름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그 이름을 덜어내고 새로 이름을 지을 때 당시 신문기사에 보면 이름을 뭘로 할 것인가에 대해서 기자들한테 의견을 물어봅니다. 그때 대통령이 제시했던 것이 뭐냐 하면 당시에 총독 관저의 기와가.
◇ 박재홍> 지금 화면으로 나가고 있는 게 총독 관저 사진입니다.
◆ 안창모> 청와였기 때문에 청와대로 하면 어떠냐. 그걸 아마 백악관으로 벤치마킹한 것 같아요. 그게 하나가 있고 또 하나가 동네가 근처 청진동이라는 지명이 있었기 때문에 청진대라고 하면 어떠냐. 그때 대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지대가 높은 평지를 이야기하는 곳이었는데 그래서 바로 그랬는데 그러다가 결론을 기자들한테 의견을 기자가 의견 냈다는 말은 없어요. 그런데 나중에 거기서 대통령이 청와대라고 해버리는 겁니다. 사실 지금의 청와대는 건물의 종류나 격에 맞는다고 볼 수가 있지만 당시에는 총독 관저의 기와지붕의 색깔을 보고 청와대라고 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그 청와대라는 이름은 적절하지 않은 이름입니다.
◆ 진중권> 저 건물이 그러면 언제 사라진 겁니까?
◆ 안창모> 저 건물은 93년도에 철거가 됩니다. 새로운 건물이 만들어지고 나서 이제 얼마 안돼 철거가.
◆ 진중권> 그럼 저 건물에서 박정희 대통령부터 전두환, 노태우부터 모든 대통령들이 거기서.
◆ 안창모> 그렇죠. 노태우 대통령 때 현재의 청와대 건물이 만들어지니까 그때까지 굉장히 오랜 현대사를 담고 있었던 거죠.
◆ 김성회> 그러면 총독 관저 말고는 다른 건물은 좀 더 지어서 보강해서 사용하기는 했겠죠.
◆ 안창모> 그 밑에 여민관 같은 건물도 있고 영빈관 같은 경우에는 78년도에 있었으니까.
◆ 김성회> 전면적인 보수를 한 것은 노태우 대통령 때 뜻을 가지고 한 거라고 봐야 되겠죠?
◆ 안창모> 신축을 한 거고 1939년에 총독 관저는 나중에 조금 더 증축을 합니다. 60년대, 70년대에 증축하고. 그렇지만 규모 자체는 별로 크지는 않았어요.
◆ 진중권> 그러니까 이름만 딱 갖다 붙였는데 나중에 건물 지을 때는 그 이름에 따라서 지은 거네요.
◇ 박재홍> 이름에 따라서 그러면 영향 받은 거네요.
◆ 안창모> 그렇죠.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됐고요. 아마 보통 저런 전통 건축 형식의 갖추는 것은 일반적으로는 정통성이 부재할 때 민주적 전통성을 내가 계승하고 있다는 이미지를 가져가고 싶을 때 보통 저런 것들을 많이 선호하죠.
◇ 박재홍> 그렇군요. 북한도 그러면 김정일, 김일성 위원장이 있는 그 궁도 약간은 전통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서 비슷하게?
◆ 안창모> 조금 다릅니다. 김일성 주석이 있을 때 살았던 곳은 그건 금수산 주석궁. 지금 나중에 지금 달리 사용합니다마는. 그것은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그것은 우리나라 전통건축의 모습하고 좀 다릅니다. 현대적인 모습을 띠고 있는데 정확하게는 말하면 사실은 전통 건축의 이미지를 현대적 건축으로 번안한 겁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전통건축의 목구조의 결구 방식을 현대적으로 번안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금수산 주석궁 같은 경우에는 딱 보면 일반인들 보기에는 전통 건축 모습 같지는 않은데, 그게 뭐냐 하면 만경대의 국회의사당 같은 경우 의사당 건물 같은 경우도 사실은 전통건축의 현대화한 그런 것들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북한의 전통 건축의 모습은 인민대학습당. 그런데 인민대학습당은 사실은 권위의 상징이나 권력의 상징이라고 보기 좀 곤란한 건물이잖아요. 왜냐하면 건물의 기능이 도서관이니까. 딱 도서관을 전통 건축의 형태로 만들어서 도시 한복판에 놨다는 것은 굉장히 특이한 거라서 사실 청와대 건물과 1:1로 비교하기는 좀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
◆ 진중권> 그런데 솔직히 저는 좀 그렇거든요. 우리 사실 건축의 형태다라는 게 재료에서 나오잖아요. 목재, 기와 이런 건데. 콘크리트 건물에 저런 기와 올라간 거 보면 굉장히 부자연스럽다는 느낌도 들고 건축학적으로 어떻게 보십니까?
◆ 안창모>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죠. 사실 건축학적으로 보면 냉정하게 보면 이상한 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실은 서양 건축에서도 보면 서양건축에서도 근대기에 새로운 재료인 철이 산업혁명과 함께 보편화되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서양의 역사적 건축양식을 철로 재현하는 일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기존의 전통적인 재료가 담당하지 못했던 역할을 신재료가 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던 거죠. 우리나라에서도 보면 콘크리트라는 것은 일종의 그런 측면에서 보면 신건축재료죠. 왜냐하면 옛날 건축 모습의 건물을 갖고 싶은데 이것이 현대적인 기능에 맞게끔 대규모로 짓고 싶으면 목조로 지을 수 없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거든요. 그러기 때문에 건축적으로 그런 실험을 할 수 있는데 그런데 우리나라 대부분의 지식인들이나 건축인들이 전통 건축을 콘크리트로 지었을 때 굉장히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것은 박정희 대통령 시기에 그런 콘크리트로 된 전통 건축이 본인의 정권을 정당화하는 방편으로 악용된 측면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에 지식인들은 그것을 싫어하는 거죠. 그 다음에 건축가들도 비윤리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걸 싫어하는데, 동시대에 북한의 콘크리트 건축은 그런 비윤리성이 없거든요. 왜냐하면 자신들의 민족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방편으로 처음부터 도입했기 때문에 똑같은 남과 북의 콘크리트 전통건축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시대적으로 표방하는 의미는 굉장히 다릅니다.
◆ 김성회> 청와대가 건축양식이 굉장히 권위주의의 상징이라는 비판도 많이 있었는데 그 지을 때 노태우 대통령이 이렇게 짓자라고 계획을 해서 그런 거였을까요, 아니면 어떤 다른 의사결정의 매커니즘이 있어서 건축가들이 그런 식으로 만들었던 거예요?
◆ 안창모> 제가 공부하면서 알아본 바에 따르면 전통 건축 형태로 짓자고 하는 것은 대통령 측의 의지였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그 건물을 설계를 의뢰받은 건축가는 대통령의 집무공간을 설계한다는 것은 굉장히 자랑스러운 일이잖아요.
◇ 박재홍> 영광이죠, 사실은.
◆ 안창모> 영광이고 이건 어느 누구도 하지 못할.
◇ 박재홍> 왕국을 짓는 거니까.
◆ 진중권> 어느 분이 설계하셨나요?
◆ 안창모> 정림건축에서 설계를 했습니다.
◇ 박재홍> 정림건축.
◆ 안창모> 그런데 그분이 부담이 돼서 이것이 잘했다는 얘기는 안 들어도 좋은데 이것이 욕만 안 먹었으면 좋겠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전통건축을 콘크리트로 재현을 할 때 곡선을 조금만 잘못 쓰면 과하게 쓰면 중국 건축 같고 조금 덜 쓰면 일본 건축 같고.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사당 같은 종류의 건물을 콘크리트로 지은 예는 있지만 사람이 그런 업무공간을 대규모로 그렇게 지어본 적은 없어요. 그렇게 했을 때 참고로 할 수 있는 건물이 뭐겠습니까? 북한에 있는 콘크리트 전통건축입니다. 사실 콘크리트로 지은 건축건물을 모델로 해서 집을 지어라라고 하는 요구는 이미 세종문화회관 지을 때 청와대에서 요구한 바 있었어요. 당시 엄동문이라는 건축가한테. 그런데 당시 엄동문이라고 하는 건축가는 현명하게 피해 가죠. 그것을 지으라고 하면 지을 수는 있는데 이것은 그렇게 하면 북한 따라하기밖에 안 된다. 아마 그 부분에서 당시 청와대가 자존심이 상했을 것 같아요.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얘기야, 어떻게 하면 좋겠어라고 했을 때 그때 전통건축을 현대화합시다. 지금은 아마 미학을 아시는 분들이거나 좀 많은 분들은 지금의 세종문화회관이 못마땅한 분들이 많으실 텐데 그렇게 지금 건물을 좋아하는 건축가는 거의 없지만 당시에 어떤 전통건축 똑같이 베끼라고 하는 그러한 정부 요구를 그런 식으로 피해서 현대화했죠.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70년대 후반에 전통건축을 현대화한 건물이 지어졌는데 북한이 70년대 중반까지 전통건축을 그대로 확대해서 뻥튀기하듯이 지었던 그런 전통건축을 현대화하는 시기가 그 70년대 중반부터입니다. 공교롭게도 남과 북이 비슷한 시기에 현대화하는 작업을 해요. 그러니까 대부분 제가 개인적으로는 북한의 평양에 있는 건축 중에서 전통건축을 현대화한 것 중에서 가장 근사한 것 중 하나가 만수대 예술극장 같은 곳. 그건 기와지붕을 안 썼지만 전통건축의 목구조의 가구 체계를 현대화 번안해서 굉장히 성공적으로 잘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어요.
◇ 박재홍> 그렇군요. 이번에 청와대를 이전하면서 윤석열 정부가 가장 큰 이유가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 그 전제 때문에 권위주의를 탈피하기 위해서 간다 이렇게 얘기했지 않습니까? 그러면 지금 있는 청와대 그 자리에 있는 공간과 지어진 양식 자체가 정말 의식을 지배할 정도로.
◆ 안창모> 사실은 건축학적으로 이야기하면 좀 진지하게 이야기하면 청와대 건물은 권위적이라고 말하기에는 조금 민망한 건물입니다. 굳이 권위적이라고 한다면 규모를 크게 하려고 했다고 하는 것은 권위적일 수 있어요. 그런데 저 건물은 지금 청와대가 보면 메인 건물이 있고 양쪽에 기역자로 꺾어서 디귿자 모양의 배치로는 만들었잖아요. 그런 건축형식은 우리나라의 관아 건축에는 없는 형식입니다. 어디.
◇ 박재홍> 관아건축이라면?
◆ 안창모> 관청 건축. 대통령 집무실이 관청 건축이잖아요. 우리 전통적인 관청건축은 정청이 있고 양쪽에 익랑이라고 날개처가 나란히 붙어 있어요. 그것이 우리가 일부만 남아 있습니다만 현대미술관 안에 있는 종친부 건물이 2채만 남아 있잖아요. 그게 일반적인 전통건축의 배치방법인데 사실 디귿자 모양의 그런 배치는 우리나라 사찰 건축에 있는 방식입니다. 사찰 건축의 골짜기에 터가 부족하니까 건물은 크게 지어야겠고. 그래서 꺾임 집을 짓는 거거든요, 배치를. 그런데 청와대의 전통건축의 형태의 건물을 지으려고 했으면 터의 크기에 맞는 규모로 건물을 지었어야 했어요. 그런데 가운데 건물을 땅의 규모에 비해서 너무 과하게 크게 짓다 보니까 옆의 건물을 나란히 못 지은 거죠. 그래서 마침 우리는 사찰 건축에도 화엄사 같은 데 보면 큰 건물이 이렇게 기역자로 돼 있으니까 하나 더 놓으면 디귿자가 돼서 가운데 모임공간이 있으니까 여기는 커뮤니티 스페이스 이렇게 표현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지었기 때문에 사실은 굳이 말하면 규모 때문에라고 할 수는 있지만 제가 보기에는 권위라기보다는 아마 그 정통성이 부재했던 시기에 우리나라 전통건축의 형태로 가는 것이 자기들이 마치 우리 문화를 보호, 육성하고 그런 수호하는 그런 이미지를 가지고 가고 싶지 않았을까.
◆ 진중권> 많은 사람들이 집무실에 딱 들어가면 너무나 넓어서 그걸 보고 보통.
◆ 안창모> 그렇군요. 그 부분은 제가 못 들어가서 모르겠는데 그런 얘기 많이 하더라고요. 그것들은 그런 걸 권위라고 하면 그 안에서는 그렇게 할 수도 있겠습니다.
◆ 진중권> 인테리어의 문제인가요?
◆ 안창모> 그것도 사실은 규모의 문제죠, 사실은. 적정한 크기의 공간을 넘어서고 저는 크기의 공간이 아니라 볼륨, 건물 내 메스의 크기를 말씀드리는 겁니다.
◆ 김성회> 들어가 보신 분들의 말에 따르면 문을 딱 열면 책상이 저 옆에 있으면 천장도 높게 돼 있고 거리가 너무 멀어서 걸어가는 동안 저절로 마음이 위축된다 이런 말씀들을 하시더라고요.
◇ 박재홍> 결재 받으러 가는 순간.
◆ 김성회> 결재는 따로 업무 공간을 옮겨서 하기는 했지만 공간 자체가 주는 위압감이 있었다 그런 말씀들을 하시는 걸 들어봐서.
◆ 안창모> 충분히 그러실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부분은. 그런데 사실은 그 부분은 어떻게 보면 그것을 처음 쓴 노태우 대통령도 익숙하지 않은 공간이었던 것 같아요.
◇ 박재홍> 그렇겠죠. 그전에 너무 작았는데 크니까.
◆ 안창모> 그러니까 본인도 굉장히 당황하지 않았을까. 그 부분은 아마 오너의 요구도 있었을 거고 건축가의 해석의 문제도 있었을 수도 있고.
◆ 진중권> 해석이 약간 권위주의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 안창모> 그럴 수 있습니다. 당연히 당시 대통령의 요구는 그 권위를 전제로 한다고 미리 해석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습니다.
◇ 박재홍> 아무튼 그래도 청와대 자체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 그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큰 공간인 것은 사실이지 않습니까? 그럼 내부에 문화재라고 할 수 있을 만한 그런 것들이 있습니까?
◆ 안창모> 청와대 권역에는 문화재 건물들이 몇 개가 있고요. 침류각이라든지 오운정이라든지 경복궁을 중건했을 때 지어진 전각들인데 사실은 일제강점기 때 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그다음에 마찰에 걸쳐서 대부분의 전각들이 주요 전각 몇 개만 남기고 다 철거됐는데 그때 괜찮은 것들을 거기 후원으로 옮겨서 정자처럼 쓰던 그런 건물들이 지금 조선 후기 때 건물이니까 문화재로,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몇 개가 있고 그다음에 얼마 전에 신문에서도 났었는데 경주 남산에 있었던 부처님, 미남불이라고 별칭을 갖고 있는 부처님이 모셔져 있는데 그것도 문화재죠. 그런 것들이 몇 개 있고 그다음에 최근에 이슈가 되고 있는 것은 현재 청와대 건물을 근대의 유산으로 보호하는 게 맞겠느냐. 그런 이슈가 하나 있죠.
◇ 박재홍> 교수님, 어떻게 판단하세요? 보호해야 됩니까?
◆ 안창모> 저는 근대유산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아까 건축이라는 것이 시대가 의식을 지배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유명한 처칠의 말에도 있고 그러니까 아마 영향을 받겠죠. 건축은 하나 지를 때 돈과 시간이 많이 들어가는 거고 많은 주체들이 개입되기 때문에 사실은 사회의 거울이라고 하잖아요. 사실 실제로 그렇고. 그리고 사실 청와대 같은 것은 이미 우리가 겪었던, 아까 대통령 쭉 넓어서 굉장히 놀라셨는데 그 역사를 담고 있는 현장이기 때문에 사실은 우리가 문화재라는 문화라는 말이 긍정적인 의미를 갖는 단어이기 때문에 우리가 좀 착시현상이 있는데 사실은 헤리티지는 긍정적인 의미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사실은 역사 유산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우리의 근현대사를 터와 건물이 그대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저는 그건 당연히 문화재로, 현재 용어로 치면 문화재로 해야 되는데, 하는데 그것을 칭송하자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증거하는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드러내는 게 핵심이겠죠.
◆ 김성회> 예를 들어서 미국 같은 경우는 백악관의 역사가 꽤 오래돼서 듣는 얘기로는 미국 대통령이 가면 이 책상 우리 링컨 대통령이 쓰시던 책상이다, 그런 걸 일종의 문화유산으로 활용하면서 거기 가면 외국 정상 오시면 앉아도 보게 해주고 방명록을 적는다고 하는데 지금 이제 청와대를 떠나서 이전을 하신 상태잖아요. 그래서 사실 교수님께서는 건축 전공이시기는 하지만 그런 식으로 그 안에 있는 공간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집기들 이런 것들이 문화예술적으로 가치를 지니는 것들을 찾아내서 보존하거나 이런 작업도 할 수 있을까요?
◆ 안창모> 저는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단지 문화예술적 가치라고 하는 것은 건물의 물건의 완성도, 높은 완성도를 떠올리기 때문에 역사적 가치가 있는 것,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서 그 의미에 맞는 대접과 교훈을 찾아가면 되는 거죠. 당연히 해야 된다고 봅니다.
◆ 김성회> 청와대를 90년대 지은 거고 그 전에 지은 건물들은 다 없어진 상태인 거죠.
◆ 안창모> 그렇죠. 위의 일부 부재만 조금 남아있더라고요.
◆ 진중권> 그런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청남대 보면 역대 대통령 동상이 있는데 그중 수난을 당하는 게 역시 전두환 각하의 동상인데. 그런 걸 안 했으면 좋겠어요. 왜냐하면 부끄러운 역사고 하지만 그것도 이미 우리 역사로 다 나와 있는 건데 그냥 역사로 보내버리는 게 맞는 방법이 아닌가 이런 생각도 좀 듭니다.
◆ 안창모> 그럴 수 있죠.
◇ 박재홍> 현재 청와대 시민들에게 개방돼서 4만 9000명까지 일일 관람객을 늘린다고 하는데 방송을 듣고 계신 청취자분들 중에 나 곧 가봐야지 이런 분도 계실 것 같아요. 교수님, 가실 분들을 위해서 이 부분은 좀 어떤 의미를 봐라 조언을 하신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 안창모> 사실 일단 아무래도 제일 먼저 관심 있는 것은 지금 청와대 그 건물, 콘크리트로 된 거대한 건물을 보는 게 가장 우선일 거고 저는 사실은 좀 더 의미 있게 그곳에 지금 현재 저는 경무대라는 이름이 굉장히 안타까운 게 이승만 대통령이 독재를 하면서 그 이름의 가치가 역사 속에 묻혀져 버렸었는데. 그리고 또 하나 이제 고종이라는 왕이 우리 역사에서 좋은 평가를 못 받잖아요, 여러 가지. 그런데 사실은 고종에 대한 평가는 여러 가지 엇갈릴 수도 있습니다마는 일본에 의해서 과도하게 폄하된 것을 진리라고 믿고 있는 식민사관이 우리 근대사에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런데 사실 아까 제가 조금 길게 설명을 드렸었는데 경무대라는 곳이 당시에 고종이 국가적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했던 장소고 국가적 위기를 벗어나려면 문과 무가 견제와 균형을 하면서 나라가 건강하게 유지돼야 되고 그러한 나라를 이끌어갈 젊은 인재를 뽑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을 하는 곳이 바로 그 청와대 그 터거든요. 그리고 그것이 문과 무의 견제와 균형, 이 사고는 거기에만 있었던 게 아니라 사실은 현재 광화문 앞에 정부종합청사 앞 삼군부와 현재 의정부 그 현장에 있었다고 치면 조선이 당시에 처했던 시대적 위기 그것을 극복하려고 했던 의지 이런 것들이 경무대에서부터 광화문, 세종로까지 이어졌었다고 보면 역사의 큰 그림 속에서 그것을 극복하지 않은 우리가 그 이후에 어떤 수난을 당했는지 그리고 사실은 식민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그 결과가 결국 경무대를 독재자한테 넘겼고 그러한 현대사를 우리가 어떠한 교훈 속에서 바라봐야 되는지 그런 부분들을 아마 되새겨볼 수 있다는 측면에서 그 청와대 건물 앞에서안 사진 찍지 마시고 뒤에 좀 돌아가시면 이제 미남불 가는 길에 산길이 있었어요. 미남불만 향해서만 걷지 마시고 가다가 히끗히끗 바라보시면 광화문과 세종로가 한눈에 보입니다.
◇ 박재홍> 그러니까 촛불집회하던 분을 볼 수 있는 장소였겠군요.
◆ 안창모> 그렇습니다. 개인적인 경험에 따라서.
◆ 진중권> 아침이슬을 들으면서.
◆ 안창모>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겠네요. 저는 그런 공간을 보니까. 그런데 그렇게 해서 보면 역사의 현장과 이것이 역사의 현장에 어떻게 능욕을 당했는지 왜곡됐는지 그런 걸 볼 수 있다는 측면에서는 사실은 그러한 공간을 좀 크게 아우르면서 보고 그러면서 그 각각의 세부적인 의미도 깊이 있게 찾아보면 좋은데 아직까지는 사실은 굉장히 더 많은 얘기들이 있고 과거에 사찰의 터도 꽤 안에 깊숙하게 있고 그런데 여전히 연구가 되지 않았어요. 그런 부분에 연구가 되면 아마 단순히 이게 현재 잔치처럼 열어두는 것은 잠깐이면 충분할 거라고 생각이 들고 이제는 차분하게 역사를 제대로 드러내는 작업이 앞으로 이루어져야 될 거라고 봅니다.
◇ 박재홍> 교수님 같은 분이 정리하셔서 좀 제자를 양성하셔서 그 역사 스토리텔러들을 그 장소에 많이 좀 배치해야 될 것 같은데요.
◆ 안창모> 그건 앞으로 하겠죠. 사실 그런 것들을 하라고 문화재청도 있고 문화재청과 함께 일하는 전문가들도 있으니까. 그런데 이제 청와대와 경복궁 중건된 경복궁은 고건축문화재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사실은 고종이 등극하면서 처했던 우리나라의 국내 상황은 우리 근현대의 굉장히 중요한 출발점이기 때문에 근대사와 역사가들이 함께 공부하고 머리를 맞대야 되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 박재홍> 건축학과 교수님을 모시고 말씀 듣는데 역사공부를 한 것 같은.
경기대 건축학과 안창모 교수
◆ 안창모> 제가 건축역사가 전공이라서 그렇습니다.
◇ 박재홍> 청취자분들 굉장히 재미있게 들으셨을 것 같습니다. 아무튼 오늘 청와대 안에 길들어 있는 역사 또 그 안에 있던 건축 이야기까지 해봤는데요.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문과 무를 함께 균형 있게 또 나라를 걱정하면서 봤던 그 역사 속의 인물들의 그 고민들, 우리 후세들도 잘 이어가면 좋겠습니다. 오늘 교수님 너무 귀한 말씀 잘 들었습니다. 경기대학교 건축학과의 안창모 교수님, 고맙습니다.
◆ 안창모> 감사합니다.
◇ 박재홍> 한판승부 오늘 마치고 두 분 마무리 발언 15초씩, 진 작가님.
◆ 진중권> 경무대가 그렇게 좋았던 뜻이 있었는지 몰랐습니다. 경무대 하면 자꾸 4.19만 떠올라서.
◇ 박재홍> 김 소장님.
◆ 김성회> 역사를 바로 알고 그 역사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함께 남기는 그것이 되게 중요할 것 같습니다.
◇ 박재홍> 방송 들으신 분이 거의 헤드셋 해설 음성 같으셨다고. 우리 안창모 교수님 칭찬해 주셨습니다. 오늘 또 방송 함께해주신 여러분, 대단히 감사합니다. 저는 박재홍이었고요. 내일 함께 보겠습니다. 한판승부.
"인터뷰를 인용 보도할 때는 반드시 프로그램명을 밝혀주십시오."
- CBS 라디오 <박재홍의 한판 승부>
6/7(화) 안창모 "청와대 관람, 고종황제가 경무대라 부른 뜻 되새겼으면"
2022.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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