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홍의 한판승부

표준FM 월-금 18:00-19:30

"인터뷰를 인용 보도할 때는 반드시 프로그램명을 밝혀주십시오."
- CBS 라디오 <박재홍의 한판 승부>

6/10(금) "광주출신 김순곤 작사 조용필의 ‘한강’, 광주 아픔 담아"
2022.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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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뷰를 인용보도할 때는
프로그램명 'CBS라디오 <한판승부>'를
정확히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저작권은 CBS에 있습니다.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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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송 : CBS 라디오 <한판승부> FM 98.1 (18:25~20:00)
■ 진행 : 박재홍 아나운서
■ 패널 : 진중권 작가, 김성회 소장
■ 대담 : 신현준 성공회대 교수 (<한국 팝의 고고학> 저자)

◇ 박재홍> 한판승부와 함께하고 계시고요. 금요일 2부 한판클라스 시간 드디어 왔습니다. 오늘은 1960년대부터 90년대까지 대한민국 대중음악의 연대기를 꼼꼼하게 정리를 해 주실 성공회대 신현준 교수님을 모시고요. POP, 한국 팝의 역사를 짚어보겠습니다. 교수님 어서 오십시오.

◆ 신현준> 반갑습니다.

◇ 박재홍> 우리 진 작가님과 김성회 소장님.

◆ 진중권> 반갑습니다, 오랜만입니다.

◆ 김성회> 안녕하세요.

◆ 신현준> 안녕하세요.

◇ 박재홍> 우리 진중권 작가님과 거의 20년 만에 만나셨다면서요, 오늘 이 자리에서.

◆ 신현준> 직접 본 건 그런데요. 하도 자주 봬서 낯선 감정은 별로.

◇ 박재홍> SNS에서 자주 만나셨습니까?

◆ 신현준> 네. 제가 친신을 했는데 까였어요.

◇ 박재홍> 친구 신청.

◆ 진중권> 정말?

◇ 박재홍> 저는 모르죠, 우리 교수님이 아시겠죠.

◆ 진중권> 저 몰랐어요.

◆ 김성회> 진중권 교수님은 여성이 아니면 페친 신청을 받아주시지 않습니다. 원칙이 있어요.

◆ 신현준> 그런 말이 있더라고요.

◆ 김성회> 그런 말이 아니라 공개한 일이기 때문에.

◆ 신현준> 원칙이 있으면 뭐.

◆ 진중권> 그게 왜냐하면 사천 몇 명까지 했는데 다 남자예요.

◆ 신현준> 괜찮습니다.

◇ 박재홍> 팔로잉을 하시면 글은 다 보실 수 있기 때문에.

◆ 김성회> 교수님은 음악 평론 쓰실 때부터 워낙 팬이어서 뵈니까 저는 되게 흥분됩니다.

◆ 진중권> 많이 싸우시잖아요, 또 이렇게. 사람들 속 긁기도 하고 그거 다 읽으시더라고요.

◇ 박재홍> 오늘 우리 신현준 교수님 모신 게 ‘한국 팝의 고고학’이라는 책을 새롭게 또 정리를 하셨어요. 원래는 60년대, 70년대 팝을 27년 전에 쓰셨는데 이제 80년, 90년대까지 확장된 판을 가지고 네 권으로 꾸미신 거죠? 총 2600쪽입니다. 양이 엄청납니다, 교수님. 이 정리 작업도 쉽지 않으셨을 것 같은데. 어떠셨습니까, 교수님?

◆ 신현준> 쉽지 않았는데 그냥 저한테는 천직처럼.

◇ 박재홍> 천직?

◆ 신현준> 해야 될 일이라고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 진중권> 자료가 남아 있나요, 많이?

◆ 신현준> 자료는 있습니다. 그런데 찾기가 좀 쉽지 않다는 문제가.

◆ 진중권> 주로 어떤 자료들입니까?

◆ 신현준> 문헌 자료 있고요. 그다음에 음반 자료도 벅스나 소리바다나 특정 업체 말을 했네요.

◇ 박재홍> 괜찮습니다.

◆ 신현준> 멜론이나 이런 게 나오면서부터 그래도 꽤 공개됐는데 제가 6070 쓸 때는 그런 시대가 아니었어요.

◇ 박재홍> 그렇죠, 17년 전이니까.

◆ 신현준> 제가 몰래 CBS 와서 자료실 가서.

◇ 박재홍> 그랬습니까?

◆ 신현준> 몰래는 안 했고요.

◇ 박재홍> 특정 PD 입회하에.

◆ 신현준> 그렇죠, 그렇죠.

◇ 박재홍> 그 특정 PD가 밖에 앉아계신 분이죠?

◆ 신현준> 아닙니다.

◇ 박재홍> 저 분 아닙니까? 알겠습니다.

◆ 진중권> 그리고 옛날에 청계천이나 옛날 LP판하고.

◆ 신현준> 물론이죠. 청계천도 많이 갔었고요. 청계천, 회현동, 황학동.

◆ 진중권> 아까 문헌 말씀하셨는데 주로 신문기사나 잡지기사 이런 거겠죠?

◆ 신현준> 신문기사, 집지기사인데 옛날 신문이라는 서비스가 있잖아요.

◇ 박재홍> 아카이브에?

◆ 신현준> 90년대 이후는 그래도 그 당시에 신문기사랑 가요계가 각각 정체됐던 시대고 보면은 기억이 나는데 88년 이후로 신문이 직면됐어요. 그러니까 이른바 연예기사가. 혹시 매거진 X라고 기억하십니까? 그런 것들이 많이 나와서 일간지 신문만 봐도 대충 파악이 되는데 한 80년대 중반 이전 그런 것들은 스포츠신문, 이런 걸 봐야지 일간지는 거의 짧은 기사밖에 없고요. 그때 4면 아니었나요, 4면? 아니면 8면 정도여서 문화면은 거의 대중문학사가 적었던 거라서 다른 매체를 봐야 했습니다.

◇ 박재홍> 하긴 옛날에는 진짜 스포츠신문 몇 백 원 주고 사는 게 굉장히 중요한 정보 수단이었는데 요즘에는 스포츠신문이 전철 가판대에서 많이.

◆ 신현준> 그 말 너무 틀딱하다고 하지 않을까요?

◆ 진중권> 같은 세대예요.

◇ 박재홍> 같은 세대입니다. 한국 팝의 고고학입니다, 책 이름이. 여기서 팝이라는 용어를 쓰시고 한국 가요라든지 한국 대중가요의 고고학 이런 용어를 안 쓰고 한국 팝이라고 하신 이유가 있으시다면서요?

◆ 신현준> 저는 전략적이었는데요. 저는 한 45년까지 한국 대중음악이, 한국 대중음악이 일반적인 범주가 있죠. 그런데 45년 이전까지는 조선유행가가 맞다.

◇ 박재홍> 조선유행가.

◆ 신현준> 그때 한국이라는 국호가 없었고요. 그리고 일본 본토의 영향을 많이 받은 그런 유행가다라고 보고요. 또 역사 논란이 있을까요?

◇ 박재홍> 괜찮습니다.

◆ 신현준> 그다음에 한 2005년 이후는 음반을 우리가 듣지 않게 된 그리고 TV, 라디오가 맥을 못 추게 된 시대는 K POP이라고 본다. 그 중간은 모호한 시기고. 임의적으로 가요라고 불러왔다. 그러다 그걸 대중가요라고 말하는 순간 좀 세월 따라 노래 따라 AM 라디오 분위기가 되고요. 여기 AM이죠.

◆ 김성회> FM입니다.

◆ 신현준> 그래서 한국과 팝이라는 게 결합하면 원만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팝이라는 말과 한국이라는 말은 원만하지 않아서 너무 좀 어렵게 얘기하나요? 그래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때로는 생쇼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무슨무슨 파동도 일어났고요.

◆ 진중권> 대마초 파동.

◆ 신현준> 차마 말을 못했는데. 그래서 그 사건과 실천을 연구했다. 인물과 작품도 하지만 그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 박재홍> 고고학이라는 단어가 붙었으니까 이 책의 내용이 굉장히 뭐랄까 엄청난 노가다의 작품이구나. 열심히 취재하시고 어떤 공부한 자료의 흔적이다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 신현준> 그건 사실인데요. 노가다가 많이 들었던 건 사실인데 생색내기는 좀 그렇고요.

◇ 박재홍> 생색내셔도 됩니다.

◆ 신현준> 그런데 고고학이라고. 제가 쓴 제가 전공자가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마구리 아마추어 고고학자인데. 저는 고고사라고 불러요, 고고사.

◇ 박재홍> 고고사.

◆ 신현준> 그리고 춤 이름 고고도 되고요. 그리고 고고하게.

◇ 박재홍> 고고하게.

◆ 신현준> 재미없나요?

◇ 박재홍> 굉장히 두 분이 아재개그를 이해 못하고 있어요. 죄송합니다.

◆ 김성회> 저는 사실 고고하게라는 말을 들을 때부터 저는 실제로 이 책 고고학이라는 말을 처음 들을 때부터 고고장 생각을 많이 했거든요.

◆ 신현준> 그게 들어 있습니다.

◆ 김성회> 어르신 고고장 다니실 때 기억을 되살리면서 쓰신 게 아닌가.

◆ 신현준> 그래서 미러볼이 있는 게.

◆ 김성회> 그러니까요. 미러볼 그림도 있고 고고장. 70년대까지 고고장이라고 불렀었나요?

◆ 신현준> 그 뒤로도 불렀는데 80년대 와서는 디스코텍 그냥 전문용어로 디텍이라고 불렀죠.

◆ 김성회> 저희 때는 나이트클럽이었거든요.

◆ 신현준> 그때는 나이트클럽 맞습니다.

◆ 진중권> 우리 때는 닭장이라고. 왜냐하면 고고학, 고고장이니까 꼬꼬장이 되고 닭장 이렇게 된 거죠.

◆ 신현준> 이렇게 너무 옛날 얘기하면 저도 아까 정치 얘기 들으면서 느꼈는데.

◆ 진중권> 이것도 고고학이에요.

◆ 신현준> 정치의 문제가 이대남, 이대녀를 어떻게 잡느냐가 관건이라고 들리더라고요, 정치 전문가가 아니지만. 이 책도 서점, 인터넷 서점에서 판매 비중 있잖아요. 20~30대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너무 좀 40~50대 중심의 이야기를 안 했으면. 그러나 어쩔 수 없는.

◇ 박재홍> BTS를 다루셨어야 되는데

◆ 신현준> BTS도 나옵니다. 엉뚱하게 나옵니다.

◇ 박재홍> 그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홍보를 하시면.

◆ 신현준> BTS를 키운? 방시혁 씨가 계시고. 방시혁 씨는 박진영 씨한테 음악을 배웠고 박진영 씨는 김형석 씨한테 음악을 배웠죠. 김형석 씨는 조동진 씨가 이끌었던 하나음악과 연관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노래 전시회라는 2인가 3인가 4인가 거기에 한국을 가수라고 부른 게 있습니다. 그러면 조동진부터 BTS가 이어진다. 초끈이론을 가지고. 한자로 초연이라 그러죠.

◆ 김성회> 실제로 조동진, 조동익 형제가 80년대 대중가요에 특히 뮤지션들에게 미친 영향을 생각하면 무리한 분석은 아니시지 않습니까?

◆ 신현준> 하나음악에 계셨던 어떤 가수가 계신데 여성 가수. 이른바 마니아층이 좋아하는 가수가 있는데 그분 부인이 박진영 씨 매니저하고 이승철 씨가 뭐죠, 서쪽하늘인가요? 갑자기 안 떠오르네요. 그 노래가 있습니다. 작곡가 일도 하고. 맞다, 장윤정 어머나 작곡가이기도 하고. 그래서 그 부인분하고 남편분은 좀 이렇게 매칭이 안 되는데 어쨌든 조동진이라는 분하고 그다음에 BTS와 이으려면 잇는다.

◆ 진중권> 책으로 들어가서 2005년에 60년대하고 70년대를 다룬 2권의 책이 먼저 나오지 않았습니까? 60년대부터 이제 한국 팝의 고고학이 시작됐는데 그런 건가요? 예를 들어서 미8군과 좀 연관이 있나요?

◆ 신현준> 많죠. 많은데 죄송한데 얘기 드리기 전에 제가 준비한 음악을 잠깐 들으면 어떨까. 고고학에 대해서 제가 준비한 노래가 있습니다. 짧습니다.

◇ 박재홍> 알겠습니다. 고고학자라는 음악. 고고하게 담은 작은 것들을 지키고 그런 마음으로 책을 쓰셨다.

◆ 신현준> 제가 이걸 염두에 두고 책을 쓴 건 아닌데요. 앞의 곡은 제가 서울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고요. 저의 고향. 남아 있는 게 없다. 다시 가보니 흔적도 없다, 그런 노래가 있어서 마음을 가져와봤고요. 밴드 이름은 3호선 버터플라이고 X세대, 노래 부른 사람이. 두 번째는 9와 숫자들이라는 밴드의 리더인 9가 솔로로 낸 앨범 타이틀이 고고학자인데요. 이 친구가 원래는 좀 노이지하고 익스페리멘탈한 음악을 하다가 어느 순간 나한테 맞는 건 옛날 가요 같다. 옛날 가요라는 게 트로트까지 안 가고요. 80년대.

◆ 김성회> 포크 뭐.

◆ 신현준> 포크. 그래서 그중에 고고학자라는 노래가 마지막에 있는데 이상하게 제 마음을 잘 표현해서 고고학이자 고고하게.

◇ 박재홍> 여러분은 많이 이게 굉장히 시크하게 표현해 주고 계시는데 고고학자까지 들어봤고요. 이제 우리 진 교수님의 질문의 궁금증을 풀어주셔야 할 것 같아요.

◆ 신현준> 미8군부대 얘기인데 미8군부대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미8군 부대에 대해 갖는 진 전 교수님과 저의 감정은 양면적일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걸 잘 어떻게 불편하지 않게 쓰는 게 저의 중요한 작업이었는데요. 중립적으로 썼다고 보이실 겁니다. 그런데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 박재홍> 탄생과 혁명이라고 60년대를 표현하셨는데.

◆ 신현준> 그런데 그 뭐라고 할까요? 미8군부대를 너무 강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그래서 일본 같은 경우에. 일본 대중음악사는 미8군부대를 이상하게 숨깁니다. 가급적 숨기려고 그러고요. 그리고 한국보다 짧았으니까요. 일본은 아마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52년, 53년쯤이죠? 그때는 미군은 갔으니까. 남아 있었지만 대부분 오키나와로 갔고 일본 본토에서 오셨는데 한국은 여기저기 다 있으니까 숨길 수가 없는 거죠. 그래서 한국은 숨길 수가 없으니까 미8군부대 출신이라고 하면 특권적인 그런 것들. 그래서 그런 비교도 좀 해 봤고요. 답은 못했는데 그런데 60년대를 잡은 이유는 미8군부대 전성기는 50년대죠. 50년대고 64년까지 지속되었다. 왜 64년일까요? 퀴즈.

◇ 박재홍> 풀어주세요. 김성회 소장님.

◆ 신현준> 한국 현대사이자 동아시아 현대사. 베트남입니다. 미군이 베트남으로 우르르 가니까 한국에서 많이 줄어듭니다. 그때 베트남에 미8군부대가 있었고 융성하는. 너무 얘기가 비화되고 있고요. 어쨌든 그런데 그런 걸 쭉 이야기할 수 있는데 미군의 영향 이렇게 해서 할 수 있는데 미군의 영향이라고 그냥 말해버리면 게으른 게 아닌가 생각이 들고요. 그래서 60년대 어떤 시대였냐 하면 우리 박정희만 떠올리는데 박정희가 뭘 했는가, 대중문화에서. 그런데 몇 가지가 있습니다. 박정희가 한 게 아니라 박정희 대통령께서 한 것이 아니라 우연치 않게 맞아떨어진 게 LP가 나왔어요. 두 번째는 KBS만 있다가 민방 라디오. CBS도 약간 뒤일 것 같아요. 60년대에 등장해서. 서울의 밤이 나왔죠, 아마. CBS는 당시에.

◇ 박재홍> 아닙니다. 지역이 부산CBS부터 시작이 돼서 쭉.

◆ 신현준> 서울, 부산만 나왔다고. 그러니까 이른바 지방에서는 못 들었습니다.

◇ 박재홍> 그러니까 전국적으로는 나중에 시간이 지나서.

◆ 신현준> 그렇게 LP, 민방 그리고 연예협회라는 게 나왔습니다. 연예협회라는 게 미8군부대에서 연주하던 음악인들하고 보통 국내 그때 일반 무대, 미군부대는 특별 무대고 일반 무대 연주하는 분들이 같이 연예협회로 조직돼서 그래서 새로운 가요가 나왔다. 그래서 그게 아마 노란 셔츠의 사나이를 많이 꼽는 이유가 노래가 좋아서 하나마나한 얘기죠, 그렇죠? 노래가 좀 히트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할 수도 있는데 일상에서는. 책을 그렇게 쓰면 안 되기 때문에 지금 말한 세 가지 이야기가 중요하다라고 했고. 미8군부대의 어떤 베이스 위에서 다른 무대도 있었고 방송 무대도 있었고 일반 나이트클럽 그때만 해도 댄스홀 무대도 있었고. 그러고 난 경험 속에서 이 작품이 나왔다, 그렇게 설명을 한번 해 봤습니다.

◆ 진중권> 그때 뮤지션들은 주로 예컨대 식민지 시대 때는 일제강점기 때는 아무래도 일본을 통해서 영향을 받기도 하고 그랬는데 그때 뮤지션들은 사실 음악을 가르쳐주는 데도 변변치 않았을 것 같고. 자신들의 음악적 훈련과 영감과 이런 것들을 주로 뭘 통해서 받았나요?

◆ 신현준> 일제 시대요?

◆ 진중권> 아니, 60년대. 50년대, 60년대.

◆ 신현준> 60년대요? 아무래도 일제시대 때가 음악 교육 같은 것은 해방 이후보다는 상태가 나았다고 볼 수 있겠죠. 전쟁 이후는 그냥 폐허니까. 37년 중일전쟁 이후부터 점점 줄어들고. 그다음에 한국 해방되고 전쟁까지 가면서 그 시기가 암흑기죠. 그런데 들어보면 그때는 악극단이라는 곳이 있어서 악극단에서 요즘으로 치면 아카데미로 운영했다. 그래서 많이 언급되는 분이 이난영 선생님 남편인데 남편인 김해송이라는 그분이 이제 한국 재즈의 바이오니아라고 하는 건데 한국전쟁 초기에 돌아가셨습니다. 당시 그런 분들은 무용교습소, 노래교습소, 악단 이런 게 있었고. 그거는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거의 힘들어지죠. 얘기가 길어지나요? 그 뒤에는 끊어주세요.

◇ 박재홍> 잘하고 계십니다.

◆ 신현준> 한국전쟁 뒤에는 아무래도 미8군부대가 돈벌이가 쏠쏠하니까 미군은 그저 푼돈이었을 것 같아요. 한국한테는 굉장히 달러가 크니까 거기에 전문적으로 정식 용어가 용역 송출업체. 서비스를 제공하는 거죠. 에이전시가 생겨난, 요즘 말로 하면 에이전시가 생겼다는 거죠. 주로 원효로일대. 이태원도 아니고 원효로라고 그럽니다. 그런 게 생기면서 그들이 그쪽에서 일종의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시작한 거죠.

◇ 박재홍> 60년대. 그러면 국민들이 아실 만한 이름은 어떤 가수 이름이 있을까요, 노래 제목이나.

◆ 신현준> 초기에 한명숙 씨, 노란 셔츠의 사나이도 있고. 최희준 씨, 위키리 씨. 그다음 갑자기 말하시니까 유주용 씨 이런 분들이 많이 계세요. 그리고 블루벨스 보컬그룹도 있고 무슨 무슨 시스터즈도 있었고요. 김시스터즈가 중요합니다. 김해송 씨의 자녀분 딸들로 구성된, 또 미국에 가서 성공도 했죠. 그런데.

◆ 진중권> 김치깍두기 부른.

◆ 신현준> 그렇죠, 그렇죠. 그런데 신중현 씨는 약간 다음 세대. 지금 말하신 분들은 20~30년대생 분들. 그런데 신중현 선생은 38년생이라고 본인이 말씀하시는데 2살 어릴지 모른다는 말도 들었는데 그러면 신중현 선생님은 또 만주생인 거 아시죠? 만주생이고 어머님은 일본인. 진정한 동아시아인이죠. 그리고 거의 전쟁 고아가 되다시피 했으니까. 선생님이 요즘 그런데 약간 연로하셔서 빨리 가서 얘기를 들어야 되는데 좀 힘들어하세요. 잘 안 들리시고. 그런 얘기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60년대 들어서 다른 것도 그렇지만 뭔가. 말 조심해야죠. 뭔가 세트는 된 거죠. 안정이란 말을 쓰기는 뭐하지만 50년대는 그냥 좀 혼돈스러웠고요. 그때는 극장에 이렇게 깡패들 들끓었다, 그런 말 많잖아요, 정치 깡패도 있었고요.

◇ 박재홍> 잘하고 계십니다. 오늘 검열을 많이 하시는데 60년대, 70년대 편집된 게 있거든요. 그걸 듣고 얘기 또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 신현준> 몇 곡 골라봤습니다.

◇ 박재홍> LP판 소리 느낌 나네요.

◆ 신현준> 일부러 LP판으로 가져왔습니다.

◇ 박재홍> 좋은데요. 음악 계속 듣고 싶은데요? 자연스럽게 70년으로 넘어갔는데 이제 70년대 하면 통기타 생각도 나고 70년대 한국 팝의 양성이 어떻게 전개됐는지.

◆ 신현준> 70년대가 우리가 유신시대라고 알고 있는 시대고요. 저는 그때 10대였고요. 그때 알게 모르게 갑갑하다는 심정을 느꼈던 것 같고요. 그 심정을 풀어줬던 노래가 아까 앞에 들었던 두 곡인 것 같은데. 앞의 곡은 장현 씨가 부른 명동거리 혹은 검은머리라는 부제가 있는데 원래 64년도에 신중현 선생이 애드포라고 부른 곡이 있어요. 그건 히트를 못했고 장현 씨가 노래도 더 잘하시고. 그래서 명동거리의 당시 느낌을 저도 누나 따라 좀 나가 본. 명동은 비싸 보이고요. 화려하고 그다음에 이렇게 여성들의 패션이 좀 다른 세계 같고 그런 걸 제가 어린 마음에 느꼈던 것 같고요. 이장희 씨의 그건 너 2절인데 어제는 비가 오는 종로거리를. 이거는 뭔가 좀 입시에 시달리는 재수생 같지 않습니까? 종로에 그때 학원이 엄청 있었잖아요. 아시나요?

◆ 김성회> 종로학원, 대성학원 말씀하시는 건가요.

◆ 신현준> 상아탑학원, YMCA학원, 대일학원 있죠.

◆ 진중권> 생각난다.

◆ 신현준> 요즘은 아무도 모르더라고요. 그 근처가 쫙 학원이고 학원 끝날 시간 되면 시커먼 머리가 바글바글 갈래머리랑 빡빡머리가. 그래서 학생들이 가는 곳이 종로였고 돈 있는 그렇게 가는 곳은 명동이고 더 돈 많은 분들 가는 곳은 무교동이었다는 얘기인데 그건 준비 안 했고요. 그다음 두 곡은. 그러다가 75년에 사건들이 많았죠. 75년 4월에 제가 듣기로는 인혁당 재건위사건 이게 있었고요. 월남 패망, 4월에. 그러면서 우리도 망할지 모른다, 그런 분위기가 저도 느꼈던 것 같아요. 물론 그 전 해죠. 육영수 여사 살해사건도 있었고요. 74~75년이 뭔가 되게 좀 뜨겁게 타오르던 시기였다는. 제가 나중에 와서 그렇게 인식을 하고 있는 건지 당시에 그렇게 느꼈는지 모르겠는데 제가 초등학교 6학년, 중학교 1학년 시기고요. 진 교수는 아직 초등학생일 때. 화곡동에서 초등학생일 때고요.

◆ 진중권> 1년 차이입니다.

◇ 박재홍> 누가 보면 한 10살 차이인 줄 아는데 1살 차이입니다. 1살 차이 굉장히 큰 차이죠.

◆ 신현준> 끊겼는데 아마 추측이지만 진 교수도 아마 놀 때는 신촌 오지 않았을까.

◇ 박재홍> 맞습니까?

◆ 진중권> 저는 이대에서 많이 놀았습니다.

◇ 박재홍> 그렇죠.

◆ 신현준> 저는 신촌에서 놀았거든요, 서북청년단이라서. 여기는 서남청년단이어서요. 김 소장님은 어디.

◆ 김성회> 저는 제가 고등학교 때 논 데는 강남역 씨에스타.

◆ 신현준> 뉴욕제과, 월팝이랑 씨에스타. 뒤에 루머스.

◆ 김성회> 저는 안 그랬고 제 친구들은 대학생증 위조해서 씨에스타를 드나들던 때였습니다.

◆ 신현준> 다들 자기는 안 그랬다고.

◆ 김성회> 제 친구 얘기였습니다.

◆ 신현준> 여기는 종로사적 세대인 것 같고 여기는 뉴욕제과 세대인 것 같습니다. 얘기가 빗나갔는데 뒤에 곡 설명을 잠깐 하면.

◆ 김성회> 동물원의 노래가 나오더라고요.

◆ 신현준> 이대 앞 길, 양병집 씨의 이대 앞 길과과 동물원의 혜화동은 나중에 회고하는 곡이죠. 80년대 말입니다. 88년, 89년 곡인데 70년대를 회고한 곡이죠.

◆ 진중권> 응답하라 1988에서 나왔던.

◆ 신현준> 이대 앞길도 여기에 신촌역이 나와요. 2호선 신촌역이 아니고. 지금 경인중앙선. 바로 나오네요. 이대생과 연애하면서 갔던 진 전 교수님의.

◆ 진중권> 최근에 화사랑의 옛날 방명록에 제 이름이 적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 박재홍> 어르신들의 얘기를 해 주셨어요.

◆ 신현준> 너무 어르신 얘기만 했어요.

◆ 김성회> 대학로 얘기 지금 하시니까 동물원 노래 보면 전깃줄 위에 윙윙거리네 이런 가사가 나와요. 요즘은 전깃줄 못 보시는 분들이 많을 텐데 그때만 해도 전신주에 전깃줄이 달려서 그 위에서 새들이 윙윙거리던 시절을 담아서 만들기는 80년대 말에 만들었지만 실제 회고하고 있는 건 70년대다, 그런 말씀을 주신 걸로 이해했습니다.

◆ 진중권> 그런데 왜 70년대, 80년대 특히 70년대 말씀하시면서 왜 나훈아하고 남진 얘기는 안 하세요?

◆ 신현준> 그게 한국 팝이라는 게 저는 비뽕을 다룬다. 뽕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 진중권> 트로트 쪽은 빼고.

◆ 신현준> 그건 다른 전문 영역의 문제가 있고 진 교수님 안 읽은 게 분명한데 80년대 2장은 나훈아와 주현미가 나옵니다.

◇ 박재홍> 알겠습니다.

◆ 신현준> 그때는 저는 뽕이라는 용어가 더 친근해서 쓰는데 트로트.

◆ 진중권> 그때는 뽕짝이라고 그랬거든요.

◆ 신현준> 트로트가 약간 팝이랑 록이랑 섞입니다. 이때 나훈아 씨의 잡초 거의 록이죠. 그래서 그건 다뤘습니다.

◇ 박재홍> 자연스럽게 80년대로 넘어가는데 이번에는 출판하신 게 80년대, 90년대를 정리하신 책인데. 80년대를 욕망의 장소라고 표현을 하셨어요, 정리하시면서. 뭐랄까요, 한국 팝의 지리학 또는 한국 팝의 건축학으로 말하고 싶었다라는 글귀가 있어서 어떤 의미입니까?

◆ 신현준> 80년대가 서울이 63년도에 진 전 교수님 태어날 때 확장됐죠. 강남도 서울이 되고 지금의 서울 크기가 됩니다. 그런데 크기만 컸지 그때 강남은 성동구 소속이었어요. 그러니까 성동구에서 강남을 관할했죠, 인구가 없으니까. 그런데 서서히 개발을 70년대 말부터 시작을 했는데 김성회 소장님도 그때 엘도라도를 찾아서 후보님이 갈 거라고 추측합니다.

◆ 김성회> 저의 아버지가 그때 회사 다니시면서 반포 1단지 지금은 가격을 따질 수 없는 거기에 분양을 받아서 들어가서 제가 강남에서 고향으로 살았죠.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 신현준> 그래서 제가 보기에는 70년대 말부터 이제 그게 강남도 개발했구나, 많이라고 느낀 게 일단 다리 놓고 그때 한남대교가 제3한강교 아니었습니까? 다리 놓고 아파트 짓고. 아파트 영동 1지구가 반포, 영동 2지구가 압구정 그다음에 잠실 이렇게 아파트를 짓고요. 여의도를 새로운 서울의 중심으로 이동을 딱 하죠. 국회랑 KBS랑.

◇ 박재홍> 여의도 순복음교회도 있었고.

◆ 신현준> 증권가. 이렇게 다 구도심에 있던 건데 새로운 도심을 만드려고 했는데 여의도의 파워는 80~90년도에 막강했던 게 아닌가. 지금은 뭔가 약간 분산된 느낌이 있죠, 여의도에서. 그게 80년대의 권력가가 떠오르는. 공간적으로 한다면. 그래서 저는 한국에서 공간과 장소는 계급의 은유 같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제가 특별히 어떤 계급을 옹호한다는 말은 아니고요. 너 어디 사냐 물으면 왜 물어봐. 자기 정체성이 드러난다는 것도 그렇죠. 민감한 말이죠. 친해지지 않으면 물어보지 못하는 말입니다. 먼저 까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서 80년대는 그런 시대인데요.

◇ 박재홍> 여의도.

◆ 신현준> 그런데 그거에 또 반항하는 세력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주로 변두리와 구도심에서 움직였다. 관악구 그리고 신촌도 변두리는 아니지만 번화가였지만 그때 용어로 부심, 부심. 고려대학교 성북 그쪽도 새로 개발된 붐타운은 아니었죠. 그래서 그런. 이분법으로 설명해도 되는 시기였다. 80년대가.

◇ 박재홍> 80년대 표현은 여의도 얘기하시고 조용필 얘기로 시작하셨던데.

◆ 신현준> 어쩔 수 없는 거 아닙니까?

◇ 박재홍> 조용필.

◆ 신현준> 80년대는 조용필.

◆ 진중권> 기억이 나는데 조용필이 딱 나왔는데 사운드가 다르잖아요. 그때 충격이었어요.

◆ 신현준> 조용필 씨가 여의도와 관련된 얘기도 많고요. 궁금한 비화도 있는데 언급을 못할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 걸. 조금 이따가 얘기할까요?

◇ 박재홍> 지금 얘기해 주세요.

◆ 신현준> 그때 김지하 씨랑 허문도씨랑 전옥숙. 홍상수 감독 어머니라고 많이 알려진. 그리고 이동철 씨가 자주 모였다. 새 시대를 위해서 뭔가를 했다. 잘 안 된 모양이에요.

◆ 진중권> 50을 위해서. 포문도라고 해서는 50의 포문도잖아요.

◆ 신현준> 아마 김지하 씨 보고 국풍에 나와달라고 그렇게 요구했는데 김지하 씨.. 돌아가신 분 얘기니까 제가 함부로 얘기할 수 없는 건데 카더라 얘기입니다. 김지하 씨가 나는 안 하겠다 얘기했다라고 말을 하셨는데 뭔가 있었단 얘기죠. 그런 50 초기에 그런 시도들이 있었고.

◆ 김성회> 그 시도라고 하는 건 문화를 융성하게.

◆ 진중권> 관제의 문화.

◆ 김성회> 관제 문화가 됐던 그런 식으로 즐겁게 사회를 만들려는 움직임이었던 건가요?

◆ 신현준> 그게 70년대와의 차이인데 박정희 대통령은 대중문화를 싫어했어요. 외래 퇴폐문화다라고 싫어했어요. 가급적 규제하려고 했고 그런데 50의 이원웅 KBS 사장님이나 이진희 MBC 사장님들은 엔터테인먼트를 좋아하셨어요. 그리고 정권에서도 엔터테인먼트 육성해라.

◆ 김성회> 소위 말하는 3S가 그런 걸.

◆ 신현준> 3S는 우리가 비판도 하지만 다 즐기지 않습니까? 지금은 그런 해석이 다르게 내릴 수 있는 면도 있는데. 프로야구도 나왔고요. 그다음에 음악도 화려한 쇼가 됐었고 언론 통폐합은 물론 잘못된 일이지만 그걸 통해서 KBS가 막강한 그런 걸 했고 CBS는 불행히도 당분간 정지가 됐었고. 80년대를 그래서 저는 뭔가 진부하지 않게 해석하고 싶은 마음이 이 책에 들어 있다고 봐주시면 감사하겠고 이 책을 그냥 대중가요, 세월 따라 노래 따라가 아니라 한국 현대사를 어떤 하나의 시각에서 보는 내러티브다라고 봐주시면 좋은데. 물론 책을 팔아야 돼서 직접적인 말은 좀 삼가는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 박재홍> 알겠습니다.

◆ 김성회> 이게 700.. 760페이지가 넘는 굉장히 두꺼운 책이네요.

◆ 신현준> 70년대가 제일 두꺼울 수밖에 없고. 욕망의 장소 얘기하다가 제가 어긋났는데요. 음악 듣고 얘기할까요?

◇ 박재홍> 음악 80년대, 8090 욕망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 박재홍> 짧게 짧게 편집하는데 계속 듣고 싶을 정도로 중요한 부분을 잘 편집해 주셨습니다.

◆ 신현준> 그것도 자의적인 선곡인데요. 첫 번째 곡은 그 유명한 국민 응원가가 된 아파트인데.

◆ 진중권> 목소리가 윤수일 씨 목소리예요?

◆ 신현준> 맞습니다. 영동대교나 잠실대교 넘어가는 느낌을 그런 드라이빙하는 느낌을 갖고요. 그때는 아파트가 좀 고독한 곳이라고 느꼈던 그런 정서를 볼 수 있고요. 다른 말로 그때 강남은 영동이라 불렸죠? 지금도 영동대교, 영동고등학교, 영동시장 이런 게 남아 있고 한때는 영동세브란스병원인데 영동이 무슨 의미인 줄 알고 제가 경악을 했었죠. 아시나요?

◇ 박재홍> 영동에 살았던 김성회 소장님.

◆ 진중권> 영등포의 동쪽.

◆ 신현준> 변두리라는 얘기죠. 여의도는 개발된 곳이고.

◇ 박재홍> 여의도 쪽 영등포 개발됐고.

◆ 신현준> 영등포는 개발됐고 동쪽 변두리.

◇ 박재홍> 변두리다, 강남이.

◆ 신현준> 아마 화곡동도 영등포구였어요.

◆ 진중권> 공항동도 영등포구 공항동이었어요. 제가 거기에 살았습니다.

◆ 김성회> 제가 다니던 경기고등학교 지을 때 사진을 보면 옆에가 다 배밭이고 아예 논밭에 아무것도 없는 풍경에 학교만 덩그러니 있는 걸 보고 제가 깜짝 놀란 기억이 있거든요.

◆ 진중권> 갔었어요?

◆ 신현준> 두 번째 곡은 송골매 곡 중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 곡인데 송골매는 조용필 이용과 버금가는 여의도의 스타였다. 방송의 파워죠. 전국 방송으로 컬러 TV. 컬러 TV 전국 방송. 그리고 오로지 두 개의 채널, 이게 80년대. 그래서 확 스타가 될 수 있었던, 통과만 하면 통과하기 되게 힘든데 통과만 하면 전국적 스타가 될 수 있는. 송골매는 9월에 재결합한다고.

◆ 진중권> 구창모 씨랑.

◆ 신현준> 구창모 씨와 배철수 씨가. 구철모 씨와 배철수 씨가 아니고. 죄송합니다. 그래서 세 번째는 좀 뒤예요. 015B의 곡인데 제목을 까먹었네요. 그런데 이촌동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조금 이따가 지하에 햄버거 집도 덮밥집도 이게 아파트 생활을 보여주는 그래서 저는 영동, 여의도, 이촌동. 저는 강남 개발보다는 80년대만 해도 강변 개발이었다. 요즘 말로 태북 개발이었고 반포 그다음에 잠원, 압구정 여기였고. 나중에 더 남쪽으로 간 거는 그 뒤의 일이다. 뒤퍼 강남 그러니까 태남.

◆ 김성회> 그렇죠. 제가 80년대 강남 살 때만 해도 법원이 아직 없을 때였거든요. 그래서 꽃동네였고 그 뒤로는 시골이었어요. 그런데 거기가 조금씩 넓어지면서 나중에 대치동도 편입되고 개포동도 편입되던 시절에 10대를 보내서 그때 개포동만 해도 강남에서 강남이 아닌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대치동이 강남의 핵심으로 바뀐.

◆ 신현준> 양재천 이남은 강남 취급 안 해 줬죠.

◆ 김성회> 양재천 부근도 그랬습니다.

◆ 신현준> 제 말은 개포동, 포이동에 양재천이 범람하면 홍수 때 갯벌이 된다고 해서 개포동이고 홍수가 더 많이 지면 잠기는 데라서 포이동이라는 이런 말도 들었습니다.

◇ 박재홍> 한국 팝의 지리학 또는 건축학을 담아서 말씀 나누고 있는데요. 80년대 음악 하면 광주 민주화운동을 겪으면서 대학가에 민중가요도 많이 불려진 시기지 않습니까? 그 부분도 교수님이 짚어주시면.

◆ 신현준> 그게 한국의 특이한 점인 것 같아요. 일본은 이런 일이 없을 거고요. 대만도 한국 정도는 아니에요. 광주 같은 그렇게 우리가 학살이라고 부를 수 있는 국가 폭력, 그런 일은 대만에는 없었기 때문에 거기는 조용하게 탄압했던 나라여서 없고. 중국은 좀 늦게 비슷한 일이 있었죠. 한 89년도에. 그래서 80년도에 광주에서 일어난 일이 저도 그런 세대고 진 전 교수님도 그런 세대였고 비디오 한 번 보고 나면 트라우마가 생겨서 한 몇 달은 힘들었던 그랬던 경험들이 다 있고.

◆ 김성회> 저까지도 그런 세대였습니다.

◆ 신현준> 그렇죠.

◆ 진중권> 같은 세대라니까.

◇ 박재홍> 공감하고 있습니다.

◆ 신현준> 그런데 이거는 제 생각은 제가 감옥도 가고 군대가 강제 징집이 됐다는 것을 생색을 내지 않겠다라는 심정으로 살아와서 그 얘기를 더 하고 싶지는 않은데 이번에 살짝 냈어요. 저는 까먹고 있었는데 임을 위한 행진곡이 테이프로 녹음돼서 이렇게 돌아다녔어요. 81년 말, 82년 초 무렵인데. 그리고 조금 뒤에 타는 목마름으로 이른바 운동권 학생들이 부르고 있었는데 그걸 악보로 만들어서 좀 다듬기도 하고 코드도 약간 바꾸고 너무 엉성하잖아요, 학생들이 구전되면. 그게 저다라는 제 주변의 전언이 있어서 그게 기억이 나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그 악보를 옮길 때 나는 이거 하다가 죽을지도 모르겠다라는 생각이 불연듯 잠시 생각한 거죠, 잠시.

◆ 김성회> 지금 2030들 잘 이해를 못 하실 텐데 그때 유인물 10장만 돌리면 그대로 끌려가서 감옥에 가거나 아니면 징집 가서 군대에 갔어야 되는 시절에 타는 목마름이라는 노래를 악보로 다시 옮기는 작업은 굉장히 위험한 작업이라고 인식하셨단 말씀이잖아요.

◆ 신현준> 그리고 그걸 노래책에 만들어 넣어서 배포하는 바람에 그게 제가 군대에 강제로 끌려간.

◆ 김성회> 실제로 그걸로 징집되신 거네요.

◆ 신현준> 네. 그것 때문에 그렇게 됐습니다. 생색을 너무 많이 내고 있나요?

◆ 김성회> 아니요, 길지 않았습니다.

◆ 신현준>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 박재홍> 그래서 소리모아, 누가 저 거미줄에 걸린 나비를 구할 것인가. 이 음원도 준비하셨다고 했는데.

◆ 신현준> 제가 임을 위한 행진곡이나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데 사실 저는 그런 생각이 있어요. 서울 사람이 알면 뭘 안다고 광주 얘기를 할 수 있겠는가라는 생각이 좀 있어요. 그래서 5.18을 자기가 당한 것처럼 말하시는 분들도 계시더라고요. 자기가 진짜 현장에 있었던 것처럼 말하시는 분들이 계시는 것 같은데, 광주 분이 아니신데. 저는 좀 그러지는 못하겠어요. 그건 개인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는데 제가 그래서 이번에 광주 가서 광주에서 그걸 겪었던 몇 분들 만나봐서 얘기를 좀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분들도 사실 저랑 비슷한 게 5.18 이전에는 아름다운 통기타 음악을 돈 몇 푼에 빈센트도 부르고 사이먼 앤 가펑클의 박서도 부르던 분이 직녀에게 작곡하고 임을 위한 행진곡 작곡하고. 다른 분이에요. 다른 분인데 그런데 제가 직녀에게 작곡가인 박문옥 1회 대학가요제 동상 받으신 전남대트리오이신데 그분 노래 중에 지금 말씀하신 그 긴 노래를 듣고 싶은데 이분이 부른 건 좀 듣기 힘들고.

◇ 박재홍> 이진우 님의 버전.

◆ 신현준> 이진우 님의 버전으로.

◇ 박재홍> 들어보겠습니다.

◇ 박재홍> 곡에 대한 설명을 해 주시면.

◆ 신현준> 이 곡이 박문옥이라는 분이 소리모아라는 3명의 통기타 그룹. 그분이 대학가요제 출전했었고요. 5.18를 겪고 대학가요제 한 10년 뒤 85년경에 10년 만에 위출이라는 타이틀로 그때 멤버들 모아서 발표한 앨범에 수록된 곡인데 그 곡은 조금 뭐랄까. 조금 프로그래시브록이라고 할까요? 포크록이나 프로그래시브록이나 핑크플루이드 느낌이 있는 그런 곡인데요. 이건 시간 지나서 약간 메탈리프도 등장하고 그렇게 편곡되었는데 광주에서 있었던 그런 음악적인 것을 임을 위한 행진곡이나 광주 출전가로 못박을 수 없다고 저는 생각이 든 거죠. 가급적 풍부한 그런 게 있었고 그러나 5.18이라는 효과, 5.18 효과. 제가 그전까지 저도 송골매도 좋아하고 산울림도 좋아했던 제가 악보를 옮겼던 것처럼 김종률 씨가 아마 임을 위한 작곡가이신 김종률 씨도 바로 1, 2년 전에는 영남과 강진이라는 곡으로 대학가요제에 출전했던 분이고 전일방송가요제에서 송악이라는 황순원 가사로 대상받은 분이었거든요. 그러니까 5. 18 효과라는 것이 어떤 것이었는가. 그때 우리는 약간 이렇게 뭔가 나쁜 의미가 아니라 미쳐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지금도 미쳐 있겠죠. 그런데 좀 많이 힘들었던 것이고 그때 그런 행동들이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의외로 이런 광주에서 나왔던 것들은 풍성한데 서울에서는 별로 주목을 안 해 줬다는 거죠. 아마 바위섬 정도가 김원중 씨가 부른 바위섬 정도가 알려진 게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 박재홍> 김순곤 씨와 조용필 씨 얘기도 준비를 하셨는데 조용필 씨 한강.

◆ 신현준> 그런데 김순곤 씨라는 분이 독특한데요. 광주에 살다가 5. 18 이런 경험은 잘 언급은 안 하시는데 조용필 씨의 작사가가 됐어요. 사연은 길어요. 그런데 고추잠자리랑 못 찾겠다 꾀꼬리라는 젊은 사람들이 좋아했던 나는 너 좋아, 이런 작사가였는데 그다음에 그러다가 또 광주에 돌아가서 소리모아의 라이벌인 꼬두메라는 그런 노래모임을 이끌게 되거든요. 그러다 다시 서울에 올라와서 본격적인 대중가요. 한국 팝인 나미의 인디언 인형처럼 그다음에 뭐 김완선의 가장무도회.

◆ 김성회> 대단한 곡 많이 쓰셨네요.

◆ 신현준> 조용필의 바람의 노래. 들으면 딱 느낌이 오는 가사가 장난이 아니네, 그런 곡을 쓴 대단한 분이에요. 그런데 이분이 꼬두메라는 그룹을 이끌었었고 사실 조용필 형님께서 이 곡은 광주와 연관된 곡이다라고 말한 곡은 생명이라는 곡이죠. 그 곡은 전옥숙 여사 작사라서 제가 헷갈리는 그 모임이 어떤 모임이었는가. 느슨한 모임이었겠죠. 누가 한 분 증언해 주시면 감사할 따름이고요. 그런데 한강이라는 곡도 묘한 느낌이 있습니다. 직접적이지는 않은데.

◇ 박재홍> 한강 짧게 듣고 오겠습니다.

◇ 박재홍> 조용필 씨의 한강 나가고 있는데요. 90년대 편 상상과 우상 정리를 하면서 거의 마쳐야 할 시간이 된 것 같아요.

◆ 신현준> 사실은 제가 80~90년대 홍보를 하려고 왔는데 옛날 얘기를 하셔서 90년대 나중에 다시 한 번. 그리고 질문 있으신가요?

◇ 박재홍> 조용필의 한강 우리가 어떤 맥락으로 이 노래를 들으면 좋을지 말씀을 주시면.

◆ 신현준> 광주와 연관이 있다.

◇ 박재홍> 광주와 연관이 있다.

◆ 신현준> 작사가가 일단 광주 출신이고 아주 암시적으로 뭔가를 담았다고 생각하고요. 그리고 아주 현대적인 사운드에 조용필 씨 특유의 한오백년 부를 때의 창법을 담은 특이한 곡인데 이런 곡은 별로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아서 저는 이런 것도 발굴이라고 본다라는 생각으로 말씀을 드려봅니다.

◇ 박재홍> 이제 BTS 얘기도 아까 살짝 했습니다마는 90년대 한국의 팝 양상까지 훑기는 했습니다. 이제 들으시는 분들은 2000년대 이후는 어떤 느낌으로 정리할 수 있을까. 그 부분 되게 궁금하실 수 있을 것 같은데.

◆ 신현준> 제가 60부터 90까지 책을 내서 제가 기대했던 반응은 20세기 정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완간 축하드립니다였는데 2000년대 이후는 언제 쓰실 거냐여서 제가 올해 환갑인데 좀 그래서 약간 난감한 상황인데요. 아까 얘기했지만 적어도 2005년 이후 사람들이 음반이라는 걸 모르게 된 시작한 시기. 그리고 라디오, TV를 잘 안 보게 된 시기. 그때는 다른 시대로 봐도 무방하고요. 그게 K

◆ 신현준> POP이고 이른바 글로벌 디지털 플랫폼, 네트워크 이런 시대여서 그건 고고학이라는 말에 적절치 않고요.

◆ 진중권> 현재네.

◆ 신현준> 저 혼자 쓸 수만도 없는 일이고.

◇ 박재홍> 김성회 소장님께 맡기겠습니다.

◆ 신현준> 그거는 젊은 필자들이나 다음에 중견 필자들. 저도 도움이 되면 같이 할 수도 있겠지만 다른 차원의 문제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 박재홍> 60년대부터 90년대까지 한국 팝의 영향을 함께하셨고요. 마지막 곡으로 준비하신 곡이 최성원의 색깔이라는 곡이네요.

◆ 신현준> 최근에 한국의 색깔론과 진영론을 넘어서보자는 저의 바람을 담아서.

◇ 박재홍> 그 바람을 담아서 최성원의 색깔을 보내드리면서.

◆ 신현준> 다양성을 추구해 보자는. 약간 진부하지만 여전히 저는 그 말이 필요하다고 보고요, 다양성. 너랑 나는 생각이 다르지만 그래도 너를 이렇게 내가 짓눌러버리겠다, 이런 생각은 하지 말아야 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서.

◇ 박재홍> 귀한 메시지입니다.

◆ 신현준> 별말씀을요. 최성원의 색깔 노래 보내드리면서 오늘 시간 마무리하겠습니다. 함께해 주신 분은 한국 팝의 고고학의 저자이십니다. 성공회대학교 신현준 교수였습니다. 교수님 고맙습니다.

◆ 신현준> 감사합니다.